brunch

존재의 이유

우리 모두는 예술작품이며, 예술가이다.

by 제주 아빠

* 바다 위 구름이 수평선을 가리고, 구름을 밀어내는 바람은 풍력발전소를 돌린다. 마지막까지 붉은 저녁놀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며 오늘 일과를 마치고 사라지는 해는 그 순간까지도 뜨거움을 훅훅 불어넣어 공기의 이동을 만들어낸다. 세상 모든 것이 존재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유일하게 인간만이 창조적 존재로서의 본질을 간직한다. 그래서 구름을 보고 달려오는 말 떼를 생각하고, 저녁놀을 보며 노래 가사를 읊조린다.



인간 존재의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한다. 이렇게 고민한 건 중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다. 특히 중학생 때는 광주로 전학을 가서 초등학교와 연계되지 않은 처음 보는 친구들을 만났고,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문화들을 강제적으로 겪게 됐으며, 무엇보다 학교폭력이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학교폭력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선생님한테 일렀기 때문이다. 당시 폭력을 행사하던 친구들은 일망타진됐고 선생님(어른)의 권위 아래 하찮게 무너졌다. 하지만 당시 또래는 그 권위가 하늘 같았기에 아무도 감히 넘볼 수도, 누구에게 이를 수도 없었던 듯하다. 나는 진즉에 내가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고민하지 말자는 생각이 있었기에 이를 수 있었다. 그 조차 존재의 목적에 대한 고민에서 얻어진 자그마한 해답 중 하나였다.


20180511_094254.jpg 인간의 위대한 창작물에 별 감흥 없다는 듯 웅크리고 자고 있는 고양이도 창조된 존재지만 창조자로서의 권위는 물려받지 못했다. 그저 바닥이 편한가, 불편한가를 느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술작품이면서 예술가인 게 인간의 본질이라는데 이르렀다. 심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본질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심미성이 없는 인간들을 보게 되면 혀를 끌끌 차고, 분노를 머금으며, 비난하곤 한다. 모두가 본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여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예술이 단순히 미술, 음악, 건축, 글과 같은 예술이라고 한정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삶을 오롯이 살아내는 것 또한 하나의 오페라와 같은 예술의 영역이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게 예술이거나 외설이거나 될 뿐이다.



신천지_천지창조.jpg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中 아담의 창조(이미지 출처 : 구글)


<창조론적 관점>


하나님(신)은 우리를 흙으로 빚으셨다고 창세기에 나온다. 먼저 천지를 5일에 걸쳐 정성스레(물론 있으라!라고 명령하셨지만) 창조하신다. 6일째 되는 날에 자신을 닮은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다. 생명을 불어넣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만드셨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만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조각품이(흙으로 빚었다는데 고려하여 조각품이라는 장르로 표현) 우리이기에 우리는 태생부터가 예술작품이다. 그리고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관리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최조의 창작 행위는 그 모든 창조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다른 존재들은 갖지 못한 창조 행위가 인간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 이후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행위를 해나간다. 물론 신의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 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지만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지고 창조해낸다는 점에서 전지전능한 신에 비할바 되지 않는다.(새로운 발명품이라고 하더라도 재료는 모두 '존재'하는 그 무언가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다르다. 마치 모든 물체에 질량을 부여했다는 힉스 입자와 같이 신의 영역은 완전한 무에서 유로 창조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딴 창조물로서 꽤나 그 역할을 잘 수행해왔다. 처음 천지를 신께서 창조했을 때도 이 세상은 아름다웠을 테지만 인간의 예술 덕분에 지금 이 세상은 더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행하는 것. 그게 우리의 지어진 목적이다.



dd066bd402a4410b6bdbf6ff2f99cbc30fb3713e875359a0759ec6b88ee73f5739ab81237969fa0e0c760a27e3e3f756d445180834ca151b8f92b56dbf4027fd8d15e130d1f4871980ca11f1d0d7038fb4e03a3302bced21acc65e01c5a78d344eaa1c7bc1b689c.jpg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종의 가장 유명한 화석을 복원한 '루시'(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진화론적 관점>


인간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한마디 보태보려 한다. 기본적으로 진화라면 자연선택설, 용불용설과 같은 이론이 있다. 이때 모두 '생존'에 더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퇴화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옷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인간은 옷 없이는 한 계절도 나지 못한다. 더욱 단단한 아래턱뼈, 악력 등은 사냥에 유리했을 것이다. 직립보행이 꼭 좋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힘은 없는데 너른 들판에 바로 서있으면 그야말로 다른 맹수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게다가 직립 보행 덕분에 허리 디스크는 포유류 중 인간한테만 있다.) 소화기관 역시 의문스럽다. 마당에 키우는 개를 보면 정말 아무거나 먹는다. 심지어 자신의 대소변까지도 먹어버린다. 그런데 배탈 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깨끗하지 않은 물을 먹어도 설사하는 거 못 봤다. 지금 인간은 물을 잘못 먹어 죽는 경우가 세상에서 제일 많다고 한다. 초창기 유인원 역시 물 잘못 먹었다고 설사하다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일하게 더 나아진 것은 지능이다. 이 넘쳐나는 지능, 그 이후로 지구 상에 지능으로 대적할 동물이 없는 인간은 생존을 위한 도구를 만들어내고 잉여의 지능으로 예술을 하기 시작했다. 동굴벽화, 토기에 새긴 무늬, 몸의 치장, 문자의 발명 등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인간은 본디 예술을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명쾌한 논리에 의해 내려진 결론이라기보다는 삶의 고뇌 속에서 내가 얻어낸 깨달음이다. 이 역시 나의 예술이다. 인간은 아름다워야 하고 아름다움을 쫓아야 한다.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것은 외적으로 보기 좋은 인간이라는데 그치지 않는다. 또한 끊임없이 창조하는 창의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의 창조 영역은 무궁무진하여 도덕, 윤리 같은 사상의 창조와 생활양식까지도 창조해냈다. 심지어는 신까지도 창조한다.(무신론자라면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테고, 유신론자라면 자신이 믿는 이외의 신들은 모두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테니 모두 창조된 것이다.)


KakaoTalk_20201214_212509040-2.jpg 나와 내 아내의 창조물들. 내 아이디어가 조금 더 반영되어 나를 닮았다. 아내의 의견을 더 반영했으면 더 예쁘고 잘생겼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만족한다.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은 심미적 존재다. 일단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름답다. 출산의 광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태곳적의 순간.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그 순간부터가 아름답다. 다른 동물들은 오직 종족 번식의 본능에 의해서 짝짓기가 이루어져 잉태를 하고 출산을 한다. 구애의 과정이 있지만 그것 역시 본능에 의한 것이지 어떤 창조적 혼에 의함은 아니다.(창조론적 관점에 의하면 그것은 신이 이미 창조한 예술작품이 되며, 진화론적 관점에 의하면 종족 번식을 더 잘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방식이다.) 그에 비해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 창조의 과정, 예술의 행위 끝에 비로소 잉태가 이루어진다.(인간의 이런 행위 역시 생물학적으로는 종족 번식을 위해 진화한 방식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행위가 단순히 진화에 의함뿐 아니라 창조의 영역이 - 연애의 기술과 같은, 가미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진화라고 보는데 반대한다.)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태어남은 일반적인 동물들의 태어남과는 그 심미적 깊이가 다르다고 느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예술작품으로서도, 사랑의 결실로 창조된 예술작품으로서도 모두 예술 그 자체다.


Medicine, law, business, engineering, these are all noble pursuits, and necessary to sustain life. But poetry, beauty, romance, love, these are what we stay alive for.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명언을 들려준다. 그 감동을 더욱 느끼기 위해 원문을 인용해본다. 8개의 단편적 단어 모두를 관통하는 것은 아름다움(beauty)이다. 앞의 네 가지 삶의 필요 역시 고귀한 목적(noble pursuits)을 갖고 있기에 그조차도 버릴 것 없는 예술이다. 심미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꿰뚫는 명언이다. 심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기에 예술을 한다. 심미와 예술은 각각 가치와 행위를 의미한다. 심미는 아름다움, 선을 추구하는 관점이다. 즉,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예술은 창조의 행위다. 창조주를 닮아 창조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 존재의 목적이다. 둘을 합치면 이성적인 창조가 된다. 인간은 이성적인 창조자들이다. 창조의 행위는 이성적인 것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성적이라는 것은 감성의 다른 편에 선 의미로서의 이성을 의미하기보다는 선을 추구하는 합리적 사고를 말한다.


차가운 머리로 만들어낸 엔리코 페르미의 핵폭탄은 인간 살상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에서 선을 추구한 합리적 사고라고 볼 수 없다. 이성적이지 못하다. 창조일 수는 있으니 이를 예술로 귀결할 수 없다. 예술가라기보다는 두려움(우리가 먼저 갖지 못하면 다른 나라가 먼저 만들어서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사라질 것이라는)의 광기에 집착한 행위자에 불과하다. 존재의 목적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래서 엔리코 페르미가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까지 존경하진 않는다.


엔리코 페르미.jpg "모두 어디 있지?" 그의 창조적 언사와 과학적 업적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핵폭탄을 만들어냄으로써 심미적 예술가라고 느껴지진 않는다.(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창조자로서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재료 두 가지는 시간과 생이다. 그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뤄내어 우리는 수억 가지의 창조물들을 이뤄내고 있다. 가장 근본이 되는 창조물은 삶이다. 오롯이 내 삶을 살아내는 것이 가장 원론적인 창조다. 내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창조자로서의 본질에 위배된다. 타인이 요구하는 삶, 타인에 의해 강요당하는 삶, 세상의 목적에 끼워 맞춰진 도구로서의 삶들은 모두 창조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요즘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해야지만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어야 가장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에. 쉽게 말해 동물적 본능을 채우는 행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돈 좀 못 벌면 어떤가. 내 삶을 창조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존재의 이유일 텐데. 아쉽게도 요즘은 예술가를 보기 힘들다.


KakaoTalk_20201214_213858508-2.jpg 첨성대가 천문대이든, 천문의 상징적 건물이든,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창조력에 감탄을 보낸다. 그렇게 창조된 예술품이기에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로 남아있다.


감사하게도 내 삶을 오롯이 창조해내고 있다. 오직 나의 심미적 관점에 의해서만 창조되고 있는 삶이다. 나와 같은 길을 걸었다는 사람을 적어도 본 적 없다. 기라성 같은 이 지구 위의 창조자들 사이에 내 삶과 닮은 삶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모방하기보다 창조한다. 닮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 해석이다.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되어보자. 우리 모두 삶을 창조해보자.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탐구해보자. 그것이 이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오늘도 나는 아름다운 내 삶을 창조해낸다.



시간이라는 오선지 위에 생이라는 음표를 더하면 나만의 음악, 삶이 된다.
keyword
이전 06화꼭 완성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