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라산과 석양. 한라산은 화산이다. 제주도를 완성하기 위해 폭발한 것은 아닐 테다. 150만 년 전 터지고 보니 제주도가 생긴 것이고 그 이후로 제주의 바다가, 바람이,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우리가 지금의 제주를 만들고 있지만 여전히 제주는 미완으로 남아있다.
흔히 말하는 좋다는 것은 다 해본 듯하다. 자기 개발서에 나오는 그런 좋다는 것도, 감성 에세이에서 소개하는 행복을 위한 것도, 청춘에게 힘을 주는 어른들의 위로 어린 글들에서 추천하는 그런 것도. 다 해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 나보다 어린 누군가 나에게 삶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꽤나 잘 상담해줄 자신이 있다. 해본 게 많아서, 겪어온 삶이 우여곡절이라서, 술술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삶을 곱씹어 왔고, 아웃풋이 인풋보다 조금 빠르게 작동하는 편이라 말로 뱉어낸다던지, 글자로 뱉어낸다던지 하는 것들은 자신 있다고... 그래서 오늘도 젊은 친구들 넷이 나한테 눈도 떼지 못하고 귀를 쫑긋하게 주목시켜놓을 만한 이야기를 좀 풀어냈더랬다. 석사학위 논문은 지지부진이지만 그래도 들어있는 게 많아서 세계사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친구들이 제법 재밌었나 보다. (소령이 얘기하는 거 상병이 당연히 듣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다. 정말 눈빛이 진지해 보였다. 그랬다...)
그런데 사실 순서는 반대다. 해보고 나서야 그런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아. 내가 잘 살아왔구나.'라고 뒤늦게서야 스스로에게 위로 섞인 탄식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나로서는 누군가 꼬치꼬치 따지고 들면서 그래서 이룬 게 뭔데라고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려고 한다면 딱히 대답하고 싶지도 않다. 흔히 말해서 대기업에 취직한다던지, 돈을 수억 번다던지,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투자에 있어서 큰 성공을 맛봤다던지 하는 것들은 나랑은 거리가 멀다. 굳이 내 인생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자랑할만한 성공 스토리 하나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이라고 하고 싶다. 물론 이것조차 니힐리즘에 빠진 요즘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다. 아무렴 어때.
솔직히 고백하건대 좋다는 것은 다 해봤지만 완성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모든 게 미완이다. 나는 쉽게 도전하고 쉽게 주제를 전환하는 편이다. 결코 포기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포기한 게 아니라 주제가 전환된 거다. 'By the way' 같은 거다. 호기심이 많다 보니, 그리고 학습이 꽤나 빠른 편이다 보니, 적당히 해보고 내 만족을 얻으면 금방 넘긴다. 그래서 종종 핀잔을 듣기도 했다. 완성된 게 없다 보니 내세울 스펙도 없다. 미군부대에서 일할만큼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는 편이지만 토익 점수는 영 꽝이다. 영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 어디에서 영어를 배웠느냐고 묻는 미군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냥 미국인 친구가 있어요 정도다. 하지만 이 역시 미완이다. 왜냐하면 처음 내가 미국인 친구를 사귀고, 영어에 흥미를 느낀 것은 찰스 디킨즈나, 셰익스피어, 에드거 앨런 포 등의 영미문학 작가들의 책을 영어로 제대로 음미해보고 싶어서였으니까.
우리 집 책꽂이에는 그 결과 영어로 된 소설책이 꽤나 있다. 유일하게 끝까지 다 읽은 것은 해리포터 마법사의 돌 시리즈 정도인 것 같다. 결국 영미문학 정복은 미완으로 끝났다. (마지막으로 본건 게이샤의 추억이고, 앵무새 죽이기는 펼쳐보지도 못했다.) 생도 생활을 하면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학점도 괜찮았고 흥미 있던 주제라 심리학 관련 서적을 꽤나 탐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한 청소년 심리 상담 자격증 조차도 없다. 3급 정도면 쉽게 딸 수 있을 텐데. 체격이 왜소한 편이라 벌크업을 해보자고 시작한 운동은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석사학위는 3학기가 끝난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 논문 첫 페이지도 쓰지 않았으며, 책을 내자고 시작한 브런치도 연재가 영 시원찮다. 게다가 소설을 쓰겠다며 고민해서 만들어놓은 주제가 3개나 있는데 전부다 1페이지만 써놨다.
한때 잠깐 고민한 적이 있었다. 딸아이는 엉덩이가 꽤나 무거운 편이다. 종이접기를 시작하면 하루에 10시간도 앉아서 한다. 9살짜리 치고는 대견스럽다. 이 아이 역시 뭐하나에 빠지면 대단히 몰입해서 해내지만 사실 끝까지 완성한 그 무엇도 없다. (물론 9살이란 것을 감안해야 한다.) 유튜브를 해보겠다고 해서 채널을 만들어줬는데 결국 지금은 다 지우고 동영상 1개가 업로드되어 있을 뿐이며, 엔트리에 빠져 며칠을 코딩만 하더니 끝내 자신이 원하던 '게임'을 완성하진 못했다. 무언가를 할 때마다 딸아이의 책상 위는 온갖 것들이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치 나와 같다고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벌여놓은 일들이라고 생각이 드니 내 버릇을 닮은 딸아이가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 고민은 이내 사라졌다. 워낙 자존감이 높아 정신승리의 대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모든 과정이 미완이었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나(시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으니 내가 여기에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하는 이 시간에도 순간의 나는 이미 지나가고 새로운 나만 있을 뿐이지만.)를 완성시킨 것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나의 존재이지 완성된 나의 어떤 과거 경험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애초에 그런 도전들을 왜 했느냐가 중요하다. 회사에 취직하기 위한 스펙을 쌓으려고, 월급을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어려운 시기에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저 기준들이니까 등등의 이유는 도전이라고 하는 본질을 설명하기엔 한참 부족하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가 들고 있는 무기가 좋고, 갑옷이 좋아서 잘 싸우는 것과 캐릭터 자체가 강해서 잘 싸우는 것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나는 뭐가 없다. 좋은 무기, 좋은 갑옷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나는 꽤나 단단한 사람이다. 내 인생의 경험도 누구에게 내놔도 때로는 신파로, 때로는 희극으로, 때로는 신화창조의 스토리로 꾸밀 수 있다. 거짓과 과장 없이 담백하게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로 내놓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끊임없는 나 스스로의 미완에 대한 다독임 같은 것이다. 애초에 내가 끝까지 써 내려갈 수 있는 소설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한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으며 소설가를 꿈꿨지만) 브런치로 시작한 제주 생활을 책으로 엮이지 않을 가능성이 마치 열역학 제2법칙의 엔트로피처럼 증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19살 고3, 십 대의 마지막 날 친구와 함께 해남에서 석양을 보고 20살, 이십 대의 첫날 일출과 함께 시작한 50여 일간의 도보여행 후 '스무 살의 여행'이라는 책을 쓰려고 했으나, 당시 카메라가 고장 나 사진을 다 날려서 실패했다. 하지만 사실 핑계라고 생각한다.)
에세이 형식의 글은 다르다. 애초에 완성이란 것 자체가 없다. 내 삶은 계속되는데 평생 써내려 가면 되지 굳이 엮을 필요가 있을까. 무엇을 위해서? 에세이라는 형식의 글을 처음으로 써낸 사람은 몽테뉴라고 한다. 몽테뉴의 수상록이 비로소 지금의 에세이를 만들어냈고 수많은 글쟁이들이 그 덕분에 미완이지만 매일 끄적임을 하며 정신승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몽테뉴의 수상록은 1,000페이지가 넘는다. 그것을 다 읽어봤을 리 만무하다. 대다수 수상록 번역본은 일부 내용을 발췌해서 나왔을 뿐이다. 그의 수상록은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애초에 완성이란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나나 몽테뉴나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그가 내가 에세이를 쓰는 마음을 통쾌하게 표현해주었다.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성실한 마음으로 쓴 것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내 집안일이나 사사로운 일을 말하는 것 말고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음을 말해둔다. 추호도 그대에게 봉사하거나 내 영광을 도모하고자 쓴 책이 아니다.
『수상록』 서문
미완의 나를 사랑한다. 앞으로도 무얼 완성하기 위해 아등바등할 생각이 없다. 완성이란 것은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장교이기 때문에 높은 계급에 오르는 열망이 있을지 모르나, 아무리 4성 장군으로 명예롭게 퇴역한다고 해도 그것을 완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국방부 장관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 것이고, 국회의원, 대통령, UN 사무총장... 어떤 계급과 직급으로의 완성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다. 결국 알고 보면 그 모두가 국가와 국민을 섬기고 있는 봉사자들 아닌가. 국민이 제일 높다. (그래서 노자의 무위자연이 철학의 진수라고 생각한다.) 높은 곳을 바라보고 완성이라고 하는 어리석음을 절대 범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유일한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오롯이 살아내는 것뿐일 것이다. 매 순간의 도전과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 즐거움은 지금도 찰나지만 이 순간의 나를 완성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