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코로나 블루

네. 처음 겪습니다.

by 제주 아빠


배부른 소리일 테다. 연일 500~600명이 넘는 감염자들이 속출하고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넘어가며, 특히 내가 몸 담고 있는 육군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적용에 모든 출타 통제에 간부들은 집과 부대만 오가야 하는 현실을 처음 겪는 나로서는 이미 여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볼 때 한심해 보일 테다. 겪어보니 이거 쉽지 않다. 나름대로 슬기로운 집콕 생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영내 체육 시설 조차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철봉에 매달려 이리저리 몸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전부다. 자연스레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하필 읽고 있는 책이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이어서 마치 지금의 모든 시간들이 오스만 제국이 망한 직후 울적한 보스포루스 해안의 이스탄불 같은 느낌이라 더 진이 빠진다. 휙 던져버리고 다시 집어 든 책은 국제정치에 관한 책인데 국제정치학 이론으로 세상을 보면 암울하기만 하다.


왜 하필 내 옆에 둔 책들이 다 이런 책들인지 책이 이렇게까지 읽기 싫은 적도 없을 것이다. 제주도에 있으면서 코로나 블루에 대해서 많이 상상했다. 그래서 가족들을 두고 혼자 올라온 것도 있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니 이거 만만치 않다. 사람들이 이래서 온라인 댓글창에 그렇게 날을 세우고 싸우려 드나 보다. 각종 소셜 미디어는 벌써 3차 세계대전 전장이다. 그게 유일한 탈출구라고 느낄만하다. 그나마 브런치가 날 부여잡는다. 쓸 글이 있고,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글이 있다. 사진 찍는 취미도 도움이 됐다. 지금은 사진을 찍을 수 없지만 찍어놓은 사진이 외장하드 한가득 들어있다. 사진들을 돌려보며 옛 추억에도 젖어보기도 하고 편집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담긴 실없는 것들을 보며 웃는 내가 웃기다 느낀다.


사실 코로나 블루를 느끼는 진짜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 아니다. 워낙 혼자 잘 노는 부류라서 이런 상황은 오히려 내 시간이 많아져 편안함을 느끼거나 풍요롭다 느낄 때도 있다. 나를 진짜 딥딥 블루로 빠지게 만드는 이유는 살짝 위에서 흘린 복선. 바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세상은 변했다. 엄청 변했다. 마침 화이자 백신 1호로 90세 할머니가 접종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코로나 19 사태 발발 343일 만에 인간이 승기를 잡는 새로운 기적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찬 기사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지난 343일간의 시간은 인류 문명을 변화시켜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변했다. 앞으로는 더 변할 것이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그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질 것이다. 우리에겐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극복할 백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바이러스 백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백신은 나올 리 만무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나약해서 이런 상황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게 종교라고 무신론자나 비종교 주의자들이 냉소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극복하기 위해 거짓으로나마 의지할 법도 한데 의지하지도 않는다. 시작부터 논리가 맞지 않는 싸움들이 도처에서 계속해서 일어난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고 허무와 부정이 넘쳐난다. 거기에 더해 자유로운 개인은 없어지고 자발적인 감시자만 늘어난다. 가뜩이나 힘든데 인간이 인간에게 의지하지 못하고 서로 목 조르고 있는 이 꼴은 공멸의 길이다. 희망을 찾아보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본다. 고대 철인이 배부른 돼지가 될지언정 배고픈 사람이 될 거라고 했다던가. 코로나 사태 간 이 말의 의미가 단순한 배부름과 편안함에 대한 사색을 넘어선 금언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럴 바에야 사람들이 모두 운명론을 믿으면 좋겠다. 차라리 죽음은 다 운명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가 걸렸느니 안 걸렸느니로 적어도 싸우진 않지 않겠는가.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게 그 이후 사람들의 시선이라고 한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따뜻한 보살핌도 못 받는 것이다. 물론 걔 중에는 정부의 방역수칙을 준수하지 않아서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됐건 다른 사람 눈에 티끌을 보지 말고 네 눈에 대들보를 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누구나 부족하며 실수할 수 있기에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탓할게 아니라 벌어진 이후의 일에 대해서 빠른 회복을 바라 주는 게 차라리 인간 아니었던가. 그래서 전장에서도 사랑이 꽃 핀다고 했고 원수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인류는 인간성이라고 하는 따뜻한 본성을 지켜온 것이었다.


코로나가 앗아간 것은 단순히 건강과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공포라는 작은 불씨를 불러일으켜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2019년은 ISIS 때문에 테러가 화두였다. 테러는 공포를 의미한다. ISIS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들보다 더 강한(그러나 보이지도 않게 작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2020년 한 해를 온 세상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버리게 만들었다. 테러도 이런 테러가 없다. 모든 인간의 영혼의 무게는 같다. 권리에 있어서 제로섬 게임은 없으며,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고 유엔에서도 말한다. 하지만 부국은 더 많은 백신을 확보하였고, 가난한 자들은 우리들이 모두 다 백신을 맞고 난 후에야 기부금을 걷어 구해진 백신을 뒤늦게서야 맞을지 모르겠다. 아직도 소아마비가 퇴치가 안된 지역이 많은 것처럼.


코로나는 모두에게 고통이다.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져 다시 코로나가 급증하여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갈 때마다 목 죄 오는 자영업자들의 고통도. 코로나 블루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대로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질 것만 같아 마스크도 벗어던진 채 클럽에 자신의 몸을 던진 그 누군가의 고통도. 누가 더 잘했고, 누가 더 불쌍했으며, 누가 더 피해자인지 따질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언론 기사들은 다시 코로나가 폭증한 데에 누군가 탓할 사람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비난할 누군가를 찾기 급급하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내가 죽을 것 같아 취할 곳을 찾기 바쁜이도 있다. 악순환의 연속. 이런 굴레는 누가 만든 걸까. 왜 이런 굴레가 생겼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가 겪는 것은 코로나 블루가 아닌 것 같다. 그것을 로스트 휴머니티 블루라고 명명해야겠다.


사랑의 부재라고 단언한다. 사랑이 이 시대에 저물어가는 단어가 된 것은 오래전일이다. n포 세대, 인구 절벽, 헬조선, 핵전쟁 등 이 시대를 풍미했던 단어들에 사랑은 찾아볼 수가 없다. n번방 뒤에 숨은 수많은 익명들도, 어린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았았지만 곧 세상 밖으로 나올 그 사람도,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들도 그 누구도 입 밖으로 사랑이란 단어를 말하기 잊었다. 이것은 마치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뭔가 겪었는데 기억이 가물하다. 영화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자꾸 잊게 된다. 그 이름을! 사랑! 사랑이라고 외쳐보려 하지만 기억이 희미하다. 사랑. 그거 어떻게 하는 거지? 그거 먹는 거야?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희미해진 이 두 음절의 단어를 대신하여 선명해지는 단어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이 감정들은 분노로 귀결된다. 분노 사회다. 미셸 푸코의 피로 사회를 뒤이어 분노 사회가 도래했다. 공포가 엄습해온다. 사랑이 없는 세상을 상상한다. 최근에 넷플릭스에 본 영화 '반도'가 생각난다. 좀비들이 그득한 세상이나 사랑 없는 인간이 그득한 세상이나 무엇이 다를까? 이대로는 안된다 생각되어 희미한 기억이나마 붙잡고 훈훈한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마구마구 뒤진다. 20년을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당시 형사들을 용서한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용서. 단어 하나를 겨우 찾았다. 사랑이 조금 선명해진다. 코로나로 고생하는 간호사들을 위해 아이스 조끼 1억 원어치를 보냈다는 이지은 씨에 대한 기사가 뜬다. 배려. 그렇지 기억났다. 사랑이 조금 더 선명해져 간다.


대구, 경북 지역에 그렇게 어려운 시기가 닥쳐왔을 때 덕분에 챌린져가 있었다. 덕분에. 하나둘 조각을 이어가며 사랑이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우리는 이제 검색창에 용서, 배려, 덕분, 존경, 존중, 희망 이런 단어를 더 찾아봐야 한다. 코로나 급증의 원인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놈 자체가 가진 엄청난 파급력에 집중하고 우리의 적을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려야 할 때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공동의 적인데 지금 사람들끼리 집안싸움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사랑이란 단어가 인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전에 '메멘토'에 나온 주인공이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긴처럼 이곳저곳에 새겨놔야 한다. 사랑! 사랑! 사랑이다! 사랑하자!


꽃보다 아름다운 게 사람이라고 어느 가수가 흥얼거렸다. 그렇게 아름답게 만개한 미소를 못 본 지 오래다. 바이러스도 통과 못할 촘촘한 하얀 천막 뒤에 가려진 미소를 지금 당장 보길 바라진 않는다. 대신 우리는 고등한 동물이라 말을 할 수 있다. 표정을 지을 수 있다. 무뚝뚝한 사람일지라도 이 기회에 눈웃음을 배워보는 것은 어떤가! 눈웃음이야 말로 진짜 웃음 아닌가? 이효리 씨의 눈웃음을 떠올려보자. 마스크로 아무리 가린대도 그 눈가의 주름 켜켜이 아로새겨진 웃음까지 가릴 순 없을 것이다! 세계 유수의 백신 제조업체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최고의 치료제가 이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우리 모두 이미 갖고 있는 면역체계.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며 그의 숨을 불어넣어줄 때 같이 넣어주었던 그것. 사랑. Love. 愛. Amour.


부디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자꾸 요즘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면. 그게 혹시 사랑은 아닐까 조심스레 말해본다. 부디 희미해져 가던, 잊어가던, 나도 모르게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치부했던, 그 단어가 이 글로 인해 다시금 선명해졌길 바라는 마음이다. 당신이 잃었던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으리라.


이제 그 아름다운 연분홍의 두 입술과 하얗게 빛나는 치아. 부드러운 혀와 몸의 모든 장기를 동원해서 한 번 끄집어내 보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 말. 사랑합니다.

keyword
이전 04화우리는 진짜 세계에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