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내가 너무 많지만 나는 모든 나를 사랑합니다.
* 스테인드 글라스의 한 조각조각은 개별로는 예술작품이 되지 않는다. 파란색, 빨간색, 검은색 등 다양한 색의 창들이 조화를 이뤄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된다. 걔 중에는 아무 색도 칠해져있지 않은 그냥 유리도 포함된다.(Trinity Church, Boston, United States ; Unsplash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Hanbyul Jeong님 작품)
여기 네 개의 창이 있습니다. 한 면은 나와 타인 모두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입니다. 다른 면은 나는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나의 모습입니다. 또 한 면은 나는 모르는데 타인만 알고 있는 나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은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면입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진정한 '나다움'일까요? 사람들은 정답 내기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저렇게 네 개의 창이 있다고 하면 그중 어떤 한 창만이 '진정한 나'라고 결론을 내리곤 하지요.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내 모습이 진정한 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는 멋진 내가 진정한 나라고 자부합니다. 나만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은 감춰둔 채 사회를 위해 나도 알고 타인도 아는 모습이라는 페르소나로 평가받길 원합니다. 그것이 사회생활할 때 유리하니까요.
어떤 사람은 너는 모르지만 나만 아는 나의 모습이 진정한 나라고 합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나를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려고 하면 나는 모니터 뒤에 숨어서, 키보드 자판 뒤에 숨어서 타인은 모르는 나다움을 발산하며 스트레스를 풀곤 하지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 그 사람은 날 몰라.' 익명성 뒤에 숨은 각종 포털 뉴스의 댓글, 소셜 미디어 활동 등이 일반적인 그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는데 타인들이 나에 대해 평가해서 덕지덕지 내 몸에 이름표를 붙이고 나의 존재를 그들의 판단 안에 가두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평상시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술 한잔 기울이거나 할 때 취중진담이란 말로 직장 상사로부터, 동료로부터 때론 친구로부터 "근데 너는 말이야..."라는 짐짓 점잖은 말 뒤에 숨겨진 비수를 보고 상처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회의 스트레스가 때로는 나를 분열시킵니다. 나도 그들도 모르는 내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와 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화를 내고 있거나, 알코올 속에 침몰해버린 내 에고(ego)를 대신해 이드(id)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하죠. 다음날 기억이 나질 않을 때 그것이 이제는 남은 아는데 나만 모르는 내 모습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또 한 번 상처 받고 곤혹스러워하죠. 하지만 과연 이런 단편적인 모습들이 '나다움'일까요?
인생이란 마치 베를 짜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날줄만 가지고도 옷감이 될 수 없으며, 씨줄만 가지고도 될 수 없지요. 날줄이 기준을 잡지만 씨줄이 반드시 그 날줄을 통과해야지만 이것이 진정한 옷감으로 탄생합니다. 나만 가지고 살 수 없고 타인과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여기서 기준이 되는 것은 날줄입니다. 결국 날줄이 기준을 잘 잡고 있어야만 씨줄이 그 사이를 통과해서 옷감이 완성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기준은 '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나다움'을 위해선 '나'를 알아야겠지요. 나는 누구일까요? 끊임없이 변화하고 고정적이지 않으며 단 한순간도 같을 수 없는 어떤 것이 여기 있습니다. 파도, 바람과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파도를 파도라고 칭하고 그 모든 바람을 바람이라고 칭합니다. 또 여기 다양한 토끼가 있습니다. 귀가 조금 더 긴 토끼, 조금 짧은 토끼, 꼬리가 짧은 토끼 등등.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종류의 동물을 토끼라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네 개의 창에서 보이는 그 모든 내가 '나'입니다. 그 어떤 창문 하나만 선택해서 '나'라고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관계 속에서 타인에게 '잘 보이길' 희망합니다. 그러다 보니 페르소나를 내세워 감춰진 나는 내가 아니라고 하던가. 아니면 반대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처 받아 저 사람은 나를 몰라라는 말로 위로하곤 하지요. 하지만 그 모든 '나'가 바로 '나'입니다.
수상록을 쓴 몽테뉴는 인간이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모두 관찰했지요. 예를 들면 방귀, 대변 이런 것들 말이죠. 그러면서 인간 군상에 대해 에세이를 남겼습니다. 여기 인스타그램에 소위 말하는 '셀럽'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찬란한 해변에서 그에 걸맞은 멋진 몸매를 명품으로 치장하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어 1:1 사이즈의 작은 사진 하나를 포스팅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아이구. 내 신세야.'라며 신세 한탄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과연 '셀럽'의 인생이 그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화려하기만 할까요? 그 사진을 찍기까지 그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무위도식하고 있으며, 24시간 1분 1초가 행복하기만 할까요? 우리는 타인에게 이렇게 관대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죠. 그것이 소셜 미디어의 폐해죠. 사실은 그 사람도 방금 화장실에서 진한 냄새를 풍기며 그의 몸속에 있던 찌꺼기를 꺼내놓고 대충 손을 씻는 둥 마는 둥 나와서 그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찰나에 불과한 어떤 한 면을 타인의 전부 혹은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승리자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가장 품격 있는 말로 그들의 치졸한 속내를 숨긴 채 말이죠. "넌 할 수 있어." 이런 말이 대표적입니다. '피로 사회'는 우리에게 할 수 있음을 강요합니다. 자본가가 더 이상 자본으로 노동력을 착취할 수 없기 때문에 우아한 말로 착취하는 거지요. 하지만 할 수 없을 수 있거나 할 수 있을 수 없으면 어떻습니까? 할 수 없으면 내가 아닌가요? 타인에 의해, 부조리한 사회에 의해 재단된 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늘려지거나 다리가 잘려나간 나를 과연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다움'은 바로 '모든 나'를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네 개의 창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네 개의 창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균형이 잘 이루어지고 있을 때 아름다운 창문이 될 것이며, 빛을 투과시켜 방안을 비출 것입니다. 사회에서 혹은 타인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 기능하는 인간으로서 사회에, 타인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일 뿐입니다. 도구적 인간이죠. 하지만 우리는 도구가 아니라 목적 자체로 존재합니다. 목적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유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가 그저 그 이유여야 합니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그것은 바로 "나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몽테뉴가 그랬듯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뒤에서 조용히 풍기는 냄새까지도 인정한다는 것이죠. 그런 나도 나라는 것입니다. 사회에 맞춰지기 위해 몸부림치며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있는 나도 그것이 즐겁던 즐겁지 않던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실패하며 고통받고 자괴감을 느끼는 것조차도 나입니다. 타인이 나에게 덕지덕지 붙여놓은 평가표 역시 나이고요. 또 내 안엔 나도 모르고, 그들도 모르는 내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조성모의 노래 '가시나무' 가사처럼 말이죠.
그 모든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페르소나를 뒤집어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나에게 오늘도 수고했어라는 위로를 건넬 것입니다. 실패로 인해 뒤에서 몰래 눈물 훔치는 나에게도 "그래. 좀 실패할 수도 있지."라며 어깨 두들겨 줄 것입니다. 나도 몰랐던 타인의 평가에 발끈하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대꾸하기보단 내가 저런 면도 있구나라며 그 조차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물론 비방을 위한 비방의 경우는 제외해야겠지요. 그것은 나를 좀먹거든요.) 아무도 모르는 내면 깊은 곳의 나는 함부로 쉽게 꺼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이 간직되어 있는 거죠.
그렇다면 이제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진 나만 남습니다. 외부의 자극과 환경이 어떻듯 나는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니까요. 그렇다면 이제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나로 살던,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던 어떻게 살던 그것은 이제 모두 다 '나다운'것입니다. '나다움'에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그저 '나답게' 사는 것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나를 느껴보세요. 그리고 그 모든 나를 사랑하세요.
나로 살아갈 자유함만 남은 나. 존재 자체가 이유인 나를 느낀다면,
이제 당신은 나답게 살 준비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