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의 연재 글을 발행하고 어렴풋이 보이는 글쓰기의 의미
* 사진 : Catalonia, Spain / Alfons Morales(Unsplash)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들의 머리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해서 각성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한 권의 책, 그것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네. - 프란츠 카프카 -
무작정 책을 출간하고 싶었다. 책을 쓰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 가장 폼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은 사색한다는 것이고 추상적인 그 행위를 뇌에서 꺼내 물리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바로 책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순한 지식을 전하는 책보다는 삶의 정수가 묻어나는 글들을 좋아한다. 표현 방식에는 구애받지 않는다. 시도 좋고 수필도 좋다. 『죄와 벌』이나 『노인과 바다』와 같은 소설을 쓴다는 것은 폼나는 일을 넘어서 위대하고 숭고한 작업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폼나는 경험을 나도 해보고 싶어서 글을 써왔다. 어떤 글은 나만 간직한 글이었고, 어떤 글은 타인에게 읽히는 글이었다. 글을 써서 돈을 벌어본 적도 있다. 나에게 있어 글을 꾸준히 쓰는 것은 마치 『큰 바위 얼굴』 속 어니스트의 삶과 같은 자세였다. 하지만 단편적인 나의 사색 행위를 그저 배설해놓은 그런 글쓰기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제대로 된 책을 내고 싶었다. 저자들이 폼나게 그들의 삶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나 역시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행위라고 생각했다. 사색의 정수를 뽑아 나의 큰 바위 얼굴인 톨스토이처럼 『전쟁과 평화』나 몽테뉴처럼 『수상록』을 쓰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렇게 하기엔 내 삶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순탄했다.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라고 하더라도 글감은 그의 삶에서 얻은 경험에 뿌리를 두지 않을 수 없기에 결국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위대한 사색의 과정을 통해 써 내릴 수 있는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위대한 작가는 어찌 보면 만들어진다기보다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내 삶을 사랑하지만 분명한 건 내 삶의 정수를 아무리 짜내어도 시베리아 벌판의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사형장의 고독을 직접 경험해본 톨스토이의 삶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내가 직접 사형수가 돼볼 필요도, 죽음의 문턱 앞에 다녀올 필요도 없다. 그들의 삶이 그들의 삶대로 의미 있듯 나의 삶도 나의 삶대로 의미가 있다. 내 삶에서의 의미를 찾아 글을 쓴다면 그것은 위대하고 숭고한 작업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폼나는 일인 것은 분명했다. 마틴 스코세지 감독이 말했고 봉준호 감독이 유명하게 한 말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처럼 나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경험을 토대로 창의적인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나만의 생각과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의 정수를 표현해갔다. 때로는 시로 때로는 수필로 차곡차곡.
책은 좋아하지만 책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독립출판사에서는 개인적인 책도 출간해주지만 비용이 꽤나 비쌌다. 그저 내 만족으로 소유하기엔 비싼 명품가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출간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결국 자기만족으로 쓰는 글은 글쓰기라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글을 썼으면 타인에게 보여줘야 한다. 나의 부끄러운 배설 행위가 타인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그것을 잘 포장할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날것 그대로 최대한 변질 없이 꺼내 놓을 것이다. 그렇게 타인에게 공개한다. 아무리 명문장으로 정수를 뽑아냈다고 해도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저 전설일 뿐 실체는 아닌 것이다.
결국 글쓰기라는 가장 폼나는 행위는 사색의 결과가 텍스트로 그것이 다시 잉크로 종이에 스며들고 편린을 묶어 네모난 종이 뭉치로 만들어내야지만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한 타인에게 읽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위대한 작품일수록 더 많이 인쇄되어 더 많이 읽힐 테니 그것이 꼭 인세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닐지라도 세상 곳곳의 가정 내 책꽂이에 나의 정수들이 꽂혀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하지만 내 삶의 정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제주에서의 삶을 선택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여느 대한민국 1984년생과 같았다. 약 40만 명이 생존해있는 이들 중에는 이미 글을 써내려 작가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혹은 그녀를 존경한다.(대표적인 예로는 "눈물은 하트 모양"을 쓴 구혜선 씨가 있다.) 나의 삶은 아직 정수로 뽑아내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고 느꼈다. 꼭 책을 쓰기 위해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쓸만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삶은 참으로 멋지지 않을까. 제주도에서 1년을 살고 그것을 위해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와 홈스쿨링을 통한 동반 성장을 이룬다면 그것은 꽤 멋진 삶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내 삶에서도 정수로 뽑아낼 어떤 경험이 생긴 것이다. 살아온 경험치만으로도 그 누구나 자신의 야기를 쓸 수 있지만 나는 아직 책이라는 정수를 맛보기엔 삶의 경험도 감각도 부족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제주살이를 토대로 포토 에세이를 써보고자 다짐한다. 그렇게 제주에 와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이곳에서의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흩뿌려 놓는다. 흩어져있는 조각들을 보며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지 이것이 책으로 될까라는 고민을 하다가 문득 브런치가 떠올랐다. 한동안 접속하지 않았던 브런치를 다시 접속해서 글을 쓰려고 하니 작가 신청의 과정부터 쉽지 않았다.(앞서 발행한 "드디어 브런치 작가" 참조) 하지만 작가가 되고 나서 발행한 글들이 의외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 첫 번째는 "#5 우리에게 필요했던 바로 그 집"이 조회수가 10,000을 넘어선 것이다. 유입경로를 보니 daum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포털 메인에 뜬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이후에 20,000도 넘겼다. 겨우 글을 올린 지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경험은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나는 폼나게 출간을 해보고 싶었고, 브런치는 내게 하나의 도구였다. 작가가 되어 괜찮은 글을 쓰면 출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또한 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썼던 글들을 세상밖에 내놓았을 때 그 반응들을 통해 내가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회수가 치솟자 마치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된 듯 내 글의 조회수와 유입에 관심을 갖고 좋아요와 댓글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브런치 글을 쓰는 시간보다 통계를 보는 시간이 더 길어진 듯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나라는 혼란이 들면서도 치솟는 조회수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원했다. 30,000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한라산에 오르면서 실시간으로 썼던 "(외전) 저는 지금 한라산 등반 중입니다."가 브런치 홈에 에디터 픽으로 업로드됐다. 첫 번째 글보다 조회수가 많이 부족했다. 2,000을 겨우 넘겼다. 왜 이런 걸까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 때문에 내 글의 제목만 보고 부동산과 관련한 글인 줄 알고 눌러봤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쯤 되니 나는 브런치 활동을 위한 브런치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사색의 깊이가 꽤나 깊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왔다. 내 생각을 적고자 하면 정말 끊임없이 배설될 글들이다. 하지만 막히기 시작했다. 어떻게 써야지 사람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써야지 조회수가 올라갈까? 가장 개인적인 것을 잃은, 창의적이지 못한 글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내 글에 대해 친절하게 평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그 생각은 더 굳혀졌다. 더 쉬운 표현으로, 호흡은 빠르게, 가독성 좋게, 재밌는 요소를 더해서 등 복잡하고 심오한 내 내면의 이야기보다는 단순하고 캐주얼한 표면적만 드러내게 된다.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캬라멜 마끼아또에서 휘핑크림만 홀랑 먹어버린 느낌이다. 이건 아닌데. 글 쓰는 속도가 더뎌졌다. 타인을 의식하게 된다. 더 이상 내 글이 아닌 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렇게는 글을 쓸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는 도구였는데 이게 목적이 돼버렸다고 느꼈다.
마침 '나도 작가다 공모전'에 출품할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공모전 글을 작성하면서 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봤다. 꼬박 10번째 글이 된 "당신은 스스로를 얼마만큼 사랑하세요?"를 쓰면서 브런치 조회수에 목매다는 나 역시 나구나. 나도 사실 속물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어찌 됐건 조회수 올라가는데 그게 싫은 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니겠는가. 이틀간 글을 쓰지 않았다. 앞으로 브런치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해봤다. 어렴풋이 글쓰기에 대한 내 생각이 정리가 됐다.
글쓰기는 내 인생을 타인에게 품위 있게 드러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내 인생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이유는 매슬로우가 말했던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 그 어딘가에 기반을 두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내 경험이 꼭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삶이 옳기 때문에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모두 충족되고 나니 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은 것이다. 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 있어서 누군가 관심 없어하더라도 그것에 상처 받지 않을 정도의 자존감은 굳게 세워져 있다. 하지만 기왕에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발현하는 것이라면 더욱 노력해서 더 많이 읽히도록 하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사이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목적과 수단의 전도다. 구독자수도, 조회수도 중요한 것이 아닌 내 글을 써 내려가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어떤 작가분은 구독자수가 80명도 채 되지 않지만 30편이 넘는 글과 4편의 작품을 쓰셨다. 이런 분이야 말로 정말 '글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제주 살이에 관한 이야기로만 브런치 북을 발간할 수 있는 10편을 써냈다. 나의 첫 번째 작은 동산을 넘은 것이다. 이제 앞으로 책 한 권이 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을 써내고자 한다. 지금 템포가 빠른 것은 작년 11월에 시작한 우리 이야기를 이제야 퇴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속도가 맞춰지면 내가 썼던 글의 조각들을 정리해서 브런치에 발행할 때 내 삶의 정수를 가감 없이 담아낼 것이다. 브런치 북을 발간하는 것은 이 작업이 모두 완성될 때 하겠다. 그때까진 멈추지 않고 써 내려가는데 집중할 것이다. 복직까지 앞으로 한 달 반 정도가 남았다. 가족들은 제주에 두고 먼저 올라간다. 내가 먼저 육지로 돌아간 이후의 삶도 계속해서 쓸 것이다. 가족들이 떨어져 지내는 모습과 단절됐던 세상에 다시 접붙이기된 나의 모습이 어떨지 지금의 나 역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