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by 제주 아빠

* 커버 이미지 Death(Davide Ragusa, Unsplash)


여기 오래된 논법을 설명하는 예문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며, 나도 사람이니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중요한 논법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임팩트 있는 예문은 없지 싶다. 죽음은 그렇게 모두에게 공평하고 논리적이다. 치명적인 이성적 결과다. 그래서 때론 분하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동물인데 너무나도 차가운 이 이성적 논제 앞에 우리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상당한 곤란함을 느끼곤 한다. 죽음은 어떤 것일까.


결과론적으로 접근해보기로 한다. 내가 죽는 것을 경험해버린 후엔 그 어떤 평가도 할 수 없기에 타인의 죽음을 가지고 논해보고자 한다. 어떤 죽음은 그렇게 우리에게 죽음이 시사하는 이 차가운 이성적 사실과 매우 곤란한 감정적 경험 사이 어딘가에서 육개장 냄새 가득한 장례식장 한복판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언제부터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른이 되고 경험한 대다수 장례식장에서는 천편일률적인 식사 메뉴가 나왔다. 국은 육개장이고 차가운 수육이 그것이다. 육개장 속 뜨거운 고기와 수육의 차가운 고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죽음은 사연이 많은데 왜 식사는 모두 한결같을까?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그들의 만남 가운데 이뤄질 대화가 너무 뻔해서 이런 것일까?


직접 경험하진 않았지만 군인이 된 이후 가장 많이 들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공군 조종사셨던 오충현 대령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생전에 어느 조종사의 일기라는 제목의 유서를 남겨 놓은 바 있다. 모든 공군 조종사는 동일한 명령을 부여받는다. RTB(Return To Base ; 기지로 생환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올라탄 전투기가 지상에서 조금이라도 떠오르는 순간 그들은 생과 죽음의 균형에서 조금은 죽음 쪽으로 치우친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매번 죽음의 문턱 앞에서 부여잡는 세 글자의 명령 RTB가 그들을 다시 땅에 발붙이게 하지만 때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故 오충현 공군 대령님 역시 그렇게 영원한 하늘의 수호자가 되셨고 그가 남긴 일기 속 구구절절한 충심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감명을 준 바 있다. 나 역시 그 일기를 따라 나의 유서를 적어두었다. 내 유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빛이 바래고 내가 예상한 나의 죽음의 의미가 그 당시와 지금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유서도 마치 V3 업데이트하듯 꾸준히 업데이트해줘야 하는구나 생각한다. 그에 반해 그의 죽음은 선명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가 누볐던 창공만큼이나 날카롭게 푸르렀다. 그렇기에 그 어떤 죽음은 이 차가운 이성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뜨거운 감정적 경험을 시사한다.


어떤 죽음은 이성적 사실조차도 거부하게 만든다. 죽음이 너무 황망해서 당장이라도 소리라도 지르면, 누군가의 멱살이라도 부여잡으면 돌아올 것 같이 느껴진다.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감정적 경험이 이성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죽음 앞에 우린 특히 더 좌절하곤 한다. 그런 경험을 한 바 있다. 고인의 생전 추억을 곱씹으며 육개장, 수육을 함께 나눠야 할 그곳에서 고성이 오간다. 그 고성 앞에 흐느낌이 커져만 간다. 왠지 정말 그렇게라도 외치면 고인이 돌아올 것 같다. 당연히도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다. 차가운 이성적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다.


어떤 죽음은 아무 말도 나눌 수가 없다. 위로를 누구에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아있는 사람에게 해야 할지 아니면 나에게 해야 할지 차라리 고인에게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조용하다. 적막이 흐르는 장례식장 속에서 후루륵대며 뜨거운 육개장이 산 자의 입을 통해 뱃속으로 들어가 생을 이어가게 하는 영양분으로 변하는 소리와 차가운 수육을 집었다 탁 놓는 젓가락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무미건조한 이러한 죽음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본다. 모든 죽음은 사연이 있게 마련이고 남겨진 자에게 슬픔을 동반하지만 인간을 도구로 대할 때 때로는 이런 죽음이 생긴다.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것도 죽음이 가진 권위련만 그 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 죽음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모든 죽음이 공평했으면 좋겠다. 남겨진 사람은 죽음에 대해 아무 논의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갑게 변한 주검처럼 이성적이고 명백한 사실은 인정하고 말고 할 문제도 아니고 오직 죽음이 가진 권위로서 마구 슬퍼할 수만 있으면 차라리 낫겠다. 흘릴 눈물은 카타르시스로 존재하고 증발할 뿐 어떠한 평가도, 측량도 없길 바란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육개장과 수육 대신 말을 삼킨다. 나라도 어떠한 평가를 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죽음 앞에 고개 숙이고 돌아설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 내가 살아있는 게 운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이러한 죽음 앞에 내가 생존한 것이 당신과 난 다르기 때문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매 순간의 생이 그저 운일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생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감사하며 살아갈 뿐이다. 어떤 죽음은 어떤 삶을 깨닫게 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죽는다는 명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삶을 깨닫는 것이 필연적이련만 죽음에 대해 떠드는 모든 사람은 자신도 언젠가 질겅대는 수육과 함께 튀어나오는 말에 섞인 삶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내가 깨달은 삶이 그저 어떤 삶이 아니길 바란다. 내가 앞으로 겪을 죽음이 그저 어떤 죽음이 아니길 바란다. 내 죽음을 선택할 수 없기에 그저 매 순간 간절히 바란다. 어떤 죽음이란 대명사에서 이런 죽음이란 고유 명사가 되길 바란다. 심플한 삶이 아주 자그마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애초에 평가할만한 무언가를 없애는 것이다. 미니멀한 삶에서 짜낼 수 있는 죽음 이후의 이야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죽음을 지워내는 특수 청소부는 남겨진 다양한 어떤 것들 통해서 사연을 읽어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면 그저 없는 대로 평가받을지 모르겠다.


내 죽음 이후에 육개장과 수육은 없길 바란다. 차라리 생전에 파티를 열겠다. 지독하게 운이 좋다면 주어진 생을(평균 수명) 살 것이기에. 혹은 조금 운이 없다고 하더라도 육개장과 수육 대신 피자와 맥주를 선택해야겠다. 맛있는 피자와 맥주라면 나에 대한 말보다 피자와 맥주에 대한 평가가 이뤄질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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