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022년 2월 19일)는 아내와 내가 "오늘부터 우리 1일이다."가 된 지 꼬박 11년 된 날이다. 날짜는 따져보니 4,019일이 되었다. 아직은 내 인생에서 아내를 알고 지낸 시간이 모르고 지낸 시간보다 길지만 이렇게 쌓여가는 하루 속에서 언젠간 아내를 모르고 지내던 시간보다 알고 함께 지낸 시간이 더 긴 날이 올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여러 문제가 겹쳐 이번 11주년은 함께 하지 못했다. 꼭 내가 장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못내 감출 수 없다지만 그것이 고통이 되진 않는다. 되레 이러한 마음이 우리의 기나긴 사랑의 시간 동안 적당한 텐션을 주기도 하고 서로의 소중함을 더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어젠 밤늦게까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서로 문자를 주고받다 잠이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는 어떻게 11년 동안 사랑하고 있을까?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다고 말하고 세상 속에서는 수많은 가정 해체 이야기가 가십거리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변치 않고 사랑하고 있다. 중간중간에 여느 부부처럼 갈등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비 온 뒤 땅이 굳듯이 더 단단해지고 있다. 만나면 밤새 수다 떠느라 잠 못 이루고 여전히 연애하던 시절처럼 데이트를 즐기곤 한다. 하도 아내만 챙기니 두 아이들이 뾰로통해질 때도 많다. 하지만 나는 우리 부부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인 우리로서 세상적 가치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곤 할 때 그런 말을 나눈다. 지금 보이는 세상은 사실 악이 만든 세상이라고. 사실 우리의 삶은 보이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더 사랑이 넘치며, 더 이타적이다. 가십거리만이 이슈가 되다 보니 그게 전부인 냥 착각하는 것이다. 서울 사람들이 천만도 안 되는 인구를 갖고 5천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냥 '대다수'라는 표현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서울 사람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 같기도 하다. 탈서울을 이뤄낸 게 내심 뿌듯하다.
들판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는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제주 꼬마 녀석들
어릴 적 상처가 많았던 나도, 상처는 많지 않았지만 사랑을 갈구했던 아내도 처음 만났을 땐 둘 다 덜 자란 미생의 영혼이었다. 물론 지금도 미생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연애의 과정에서 우리는 성숙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애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나를 스스로 사랑하는 것. 세상은 그 누구도 나만큼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절대적인 신의 사랑을 제외하면 나 자신의 사랑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만나 가정을 이룬다면 서로의 삶에 상처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갔다. 결혼은 마치 내가 그리는 도화지 위에 상대방이 그림 하나를 더 해주는 것이다. 절대 망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직 그 도화지 위에는 사랑하는 남편, 아내만이 그림을 더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내가 먼저 내 도화지를 사랑하고 잘 그려내는 것이다. 때로는 엉망으로 그린 그림 위에 사랑하는 사람이 살짝 붓터치를 가해 아름답게 꾸며줄 수 있지만 그것은 꾸며진 모습에 불과하다. 앞으로 스스로 그려야 할 그림이 여전히 엉망이라면 아무리 현숙한 아내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그림은 끝내 엉망으로 남을 것이고 그게 곧 불행한 삶인 것이다.
살아가며 내린 작은 결론이라면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분명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이어가기도 하지만 때론 노력도 해야 한다. 그 무위자연의 노자적 사상과 예와 인의 노력을 인위적으로 가해야 하는 공자적 사상의 중간 어디쯤 있다. 나는 그것을 에피쿠로스에서 찾곤 한다. 상처받은 영혼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만난다면 그 상처가 해결되면 이제 관계가 끝나는 것일까? 혹은 상대방이 더 이상 그 상처를 보듬어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끝나는 것인가? 삶은 그렇지 않다. 물론 운이 좋게도 평생 그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관계가 이어진다면 적어도 관계가 끝나지 않고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사랑도 때로는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엇이 되었든 그들이 만족하면 그만인 것이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서 혹은 여타의 어떤 조건을 위해, 조건 때문이 아닌 그저 사랑을 해보길 바란다.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늘 주근깨가 늘었다고, 주름이 늘었다고 투정하는 아내지만 그 주근깨 수만큼, 주름만큼 우리 사랑 더 늘었다는 뜻인지 나는 안다.
그저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으레 사람은 외모적으로, 성격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떠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저 사랑한다는 것은 그러한 조건 앞에 사랑을 앞세우라는 것이다. 아름답고 예뻐서 사랑하기보다 사랑하니 아름답고 예뻐 보이는 것이고, 돈이 많아서 사랑하기보단 사랑하니 돈이 부족해도 살 수 있는 것이고, 성격이 친절하고 상냥해서라기 보다 사랑하니 친절하고 상냥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두 영혼이 만나는 것.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두 영혼이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다는 것. 그 둘이 손잡고 함께 뚜벅뚜벅 삶을 살아내는 것. 동행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전히 소녀 같은 아내는 제주도에서의 삶을 잘 누린다.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출근길에 바다가 보고 싶다며 바닷길로 새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바다가 보고 싶으면 차를 돌리곤 한다. 아름다운 외모에 걸맞지 않은 비싸지 않은 적당한 옷을 입고도 빛나 보일 줄 안다. 아이들과 같이 동심으로 돌아가 놀 줄도 안다. 동시에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화를 낼 줄도 알고, 11살, 8살짜리 아이들 때문에 삐지기도 한다. TV에 나와서 너무나도 완숙하게 아이를 잘 다루는 오은영 박사님 같은 분과 비교하자면 내 아내는 딸, 아들내미와 비슷한 수준의 피터팬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 반해 나는 사회생활을 오래 하면서 조금은 더 성숙해졌다. 부대에서 내가 일하는 모습과 아내와 함께 데이트하는 모습을 비교하자면 나는 완전히 이중인격자 일지 모르겠다. 동시에 아이들 때문에 삐진 아내에게 조언을 할 때 듣고 있는 아내의 모습은 또 신중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부족한 우리 둘이 손잡고 함께 도화지에 예쁜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 아내를 철없다고 불평하지 않으며, 그런 남편을 너무 진지하고 딱딱하다고 재미없다 하지 않는다.
각자의 삶을 사랑하기에 상대방의 삶을 사랑해줄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각자의 삶에 들어간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일 것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 거기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사랑과 노력하는 사랑의 균형 속에서 우리는 변함없이 11년째 사랑하고 있다. 사랑은 물과 같아서 그 형태가 변하기도 한다. 지금은 우리가 건강하고 함께 꿈꿀 수 있는 날들이 많아 지금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 어느 하나가 완전히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될 때가 온다면 그때의 사랑은 또 숭고하고 지고지순한 아가페적 사랑으로 변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가페적 사랑의 발로는 우리가 성인이거나 위대한 영웅이 아닌 범인인 이상 함께했던 오랜 추억과 사랑했던 기억인 것이기에 지금의 우리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밤하늘의 별도 달도 따줄 것처럼 호언장담하기보단 내가 옆에서 별과 달이 되어주고 아내를 나의 별과 달로 대하는 사랑을 해야겠다.
사람들은 각자만의 사랑의 모양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의 모양이 어떻든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 뉴스에 비친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행복에 겨운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행복을 나누고 그렇기에 어렵고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사랑을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다. 제주에서의 우리의 삶이 그러다 보니 때론 뉴스를 보다 보면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미안해하기보다 실천으로 옮기고자 이곳에 사명을 갖고 서있다. 사랑에 상처받기보다 사랑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렇게 하기 위해 늘 그렇듯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고 당부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당부한다. 아무리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이더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고통이라면 부족한 나 자신을 인정하고 그런 자신을 사랑해주는 나의 모습을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해주실 것이기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신앙일 것이다. 세상적 가치가 마치 전부인 냥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치중해서 사는 내가 스스로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이다. 타인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저 이용당하고 사랑받고 있으나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거나, 사랑받지 않고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하자. 그렇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미생의 영혼이지만 동행하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칭하고 싶다.
나를 사랑하는 나. 너를 사랑하는 너.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은 우리를 사랑하는 우리의 11주년을 기념하며, 11년이 110년이 되는 날까지 물 같은 사랑, 나무 같은 삶을 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