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병철의 '피로 사회'
* 드라마 '나의 아저씨' 포스터(출처 : 구글)
사랑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필리아, 스톨케, 아가페, 에로스. 사회가 구성되고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 사랑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지만 진짜 살맛 나는 사람냄새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필리아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협력으로 제도적인 틀을 이어나갈 수 있고, 그 안에서 가장 밑받침이 되는 것은 가정이기에 스톨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어떤 틀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에겐 때로 기적이 필요하고 아가페가 그 기적을 일으키곤 한다. 에로스는 다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순환을 제공하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이 균형이 깨지면 가령 필리아가 에로스로 변질되거나 스톨케가 무너지고 아가페가 전혀 없다면 그 사회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이 네 가지 사랑이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에 박동훈 부장(후에 상무가 되었다가 대표가 됨.)의 역할이 지대하다. 세상 재미없어 보이고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따분한 이 사람의 삶이 숭고할 수 있던 이유는 혼자 이 네 가지 사랑을 다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 의미도 알지 못하는데 그저 지키고 있다. 그래서 혼자 지옥을 살고, 혼자 쓸쓸함을 견디며, 혼자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우리 사회의 많은 아저씨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 흘리고 공감했다고 한다. 작중 손녀 가장으로 세상 불쌍함을 혼자 다 간직한 채 나오는 이지안과 박동훈 부장의 긴가민가한 러브라인 때문에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통해 많은 대한민국 아저씨들이 힐링을 얻었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 역시 한국 나이로 올해 39세의 아저씨지만 아직 마흔을 넘기지 못해서인지 사실 공감이 잘 가지 않아 조금의 분석의 과정이 필요했다.(물론 못 느끼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아내의 지지와 사랑이 커 박동훈 부장처럼 혼자 쓸쓸할 필요 없어서다.)
대한민국 사회는 알게 모르게 남자들에게 맨박스를 강요하는 사회다. 남자라는 이유로 견뎌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사실 세상에 가십거리로 튀어나오는 수많은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남자의 모습은 일부에 불과하고 대다수 남자들은 세상 풍파 혼자 견디고 외로움과 쓸쓸함에 지치지만 버텨내고 버텨내며 지금의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그들 모두가 이러한 쓸쓸함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이미 가정은 다 무너지고 엉망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돈 버는 기계로서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아저씨들은 집에서는 존경받지 못하고, 일터에서는 꼰대에 불과하며, 마음이 아무리 청춘이어도 나오는 배만큼 매력은 잃어가 자존과 자괴의 어느 지점에서 뒤뚱거린다. 걔 중에는 그래도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기부금 몇 푼에 자기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그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가페가 되기엔 갈길이 멀다. 적어도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다. 이 드라마의 백미는 사실 미시적으로 아주 세밀하게 들여다본 한국 아저씨의 모습에 있다.
박동훈 부장을 둘러싼 배경과 여러 인물들은 사실 실존하는 인물에 가깝기보다는 세상의 수많은 시선과 가십에 가깝다. 알고 보면 모두가 박동훈 부장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상무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 남자도 화려해 보이는 그 삶 뒷면엔 사랑받고 존경받고 싶어 발버둥 치는 나이 들어버린 피터팬이 자리 잡고 있다. 영화 '후크'에 나오는 날지 못하는 피터팬처럼. 되레 나로선 이 드라마가 주는 교훈 중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컸다. 사회보장제도 같은 중요한 것들, 가령 상속포기라던가, 요양 심의, 건강보험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기능들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박동훈 부장 같은 아저씨들 일지 모르겠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실제로 이지안과 같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가 많다. 남자건 여자건 아저씨로서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는 게 놀랍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중년 아저씨의 삶은 가정을 챙기기도 버거운데(하지만 존경받지도 못해 쓸쓸한데) 직장에서는 수많은 이지안들을 돌봐야 하고, 돌보면서도 자칫 꼰대 소리를 듣거나, 드라마에서처럼 괜히 스캔들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도 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용기 내는 아저씨들이 많다. 이 사회를 유지하는 네 가지 사랑을 혼자 가득 담고 재미없고 쓸쓸함이 넘치는 삶 속에서 매일매일 도살장 끌려나가는 기분으로 터벅거리며 지옥 같은 교통체증을 견디며, 전쟁터로 향한다. 어릴 적 가졌던 취미생활도 나이 들어서는 유지하기 어렵다 보니 기껏해야 하는 게 조기축구회고 술판일 뿐이다. 단조롭고 재미없는 삶. 일본의 유명한 밴드 Mr. Children의 くるみ(쿠루미)라는 노래에서 묘사된 어른들의 삶처럼 그들 역시 꿈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저 아저씨처럼 살아갈 뿐이고 여전히 꿈꾸고 있는 현실의 괴리에 위태하게 놓여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들이 우리 사회의 진정한 영웅일지 모른다. 영웅들은 꼭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도 사실 가난한 대학생에 불과하지 않는가. 이런 영웅들이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고, 이 드라마가 그 영웅들을 알아봐 줬다는 면에서 아저씨들을 열광시킨 것은 아닐까? 불쌍한 자신의 삶을 알아봐 주고, 이지안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아저씨의 모습. 대리만족을 느꼈으리라 짐작이 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초창기와 다르게 지금은 착취가 단순히 자본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할 수 있다는 이 아름다운 말속에는 사실하지 못하면 안 된다, 기능해야 한다는 협박이 숨어있다. 어느 시대보다 자기 착취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기 착취 중에서도 아저씨들의 자기 착취는 드라마에 비친 박동훈 부장의 한숨만큼이나 깊다. 도청된 그의 휴대폰 속에서 연신 들리는 한숨 속에 이지안의 마음은 조금씩 변해간다. 현실에서는 그런 한숨을 듣고 변해주는 사람이 없기에 아저씨들은 외롭고 쓸쓸하다.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어야 하는 아저씨의 깊은 한숨은 술로 담배로 채워질 뿐인 게 현실인데 드라마에서는 이지안이라는 사람이 파이팅 한 마디 외쳐주지 얼마나 감지덕지한가. 사실 알고 보면 아저씨들에게 필요한 것은 딱 그 정도의 응원이었을 뿐일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런 지지는 당연히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스톨케와 에로스에서 시작된 사랑의 힘이 필리아를 지탱하고 아가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요즘 시대는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작중 박동훈 부장의 오랜 친구이자 후계동의 꿈이었으나 이제는 입적하여 승려가 된 겸덕은 오히려 현실을 도피한 인물로 지나지 않는다. 현실의 풍파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싸워내며 끝내 미소 지을 수 있는 박동훈 부장이 되레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늘 그렇듯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기애.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닥친 그 어떤 어려움도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넘길 수 있는 아량을 가진 자존감 넘치는 사람이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닐까. 박동훈 부장의 주문 같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우리에게 주는 위로이기도 하다. 네 가지 사랑을 모두 뭉쳐놓은 것이 자기애가 아닐까 싶다. 박동훈 부장이 아무리 따분해 보이고 재미없는 삶을 살고, 아내로부터 배신당하고 직장에서 수모를 당했다지만 그의 모든 생각과 일련의 행동들은 그 누구보다 깊었던 자기애로 향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지안의 고백에도 흔들림 없이 오직 아가페와 필리아만 나눌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아내와 똑같이 행동을 했으면 그것은 자기 파괴적 행위에 불과하고 더 이상 사랑이라고도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가 그런 행동을 하고 후회와 고통에 사는 자기 파괴의 시간을 겪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 사회는 압축성장을 일으키면서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어버렸다. 12년 공교육은 성장과 추억의 시간이기보다 입시의 고통으로 변질되었고, 대학 4년은 본격적인 인간으로서의 성장과 더불어 삶의 방향을 정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취업을 위한 학원에 불과하다. 직업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함께 성장시키기 위한 삶의 과정 중에 있는 수단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먹고사는데 필수적인 목적처럼 되어버렸다. 이렇게 피로한 사회 속의 가장이면서 사회의 중추 역할을 하는 중년 남성 아저씨들에게는 여전히 피터팬 같은 순수함이 남아있기에 이지안은 어쩌면 그들에게 다시 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는 웬디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의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나이가 젊어도 직업적인 특성상 '아저씨'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노력한 결과 지금 대다수가 훌륭히 성장하여 편안함에 이르러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가끔 힘들 때 전화나 문자로 지혜를 구하기도 한다. 나에 대한 그들의 존경과 애정이 감사하다. 아내와 자녀들이 남편을 아빠를 존경해주는 것 역시 든든한 나의 버팀목이다.
'나의 아저씨'는 드라마다. 현실 세계에 있을 법하지만 사실 극히 가능성이 적다. 16부작의 짧은 드라마가 이 시대의 아저씨들에게 눈물, 콧물과 더불어 활력을 줬다는 면에서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라마 속의 아저씨가 더 이상 현실에 없는 사회를 꿈꾼다. 가정에서 존경받고 아내에게 사랑받으며, 직장에서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바라보며, 사내 정치질 따위 없는 사회. 이지안같이 소외받는 사회적 약자가 없고 그런 약자는 정부에서 제도적으로 충분히 지원이 될 수 있는 사회. 필리아, 스톨케, 아가페, 에로스가 조화와 균형을 이뤄 사랑이 넘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유토피아라고 부르곤 한다. 다만, 이런 사회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범인들이 만들어가는 세계다. 나 스스로 나를 착취하지 않고 사랑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잘 양육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행복하자.'는 그의 말이 이지안을 향하기 전 자기 자신에게 다짐한 것처럼 들리는 것은 어쩌면 이런 이유일 것이다. 이 시대의 아저씨들에게 선한 자기 사랑을 권장한다. 그것은 꼭 이지안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박동훈 부장의 따분해 보이는 삶 속에서도 그가 사랑한 그의 삶이 있었기에 이지안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한 영향력의 힘을 믿는다.
<Mr Children - くるみ>
https://www.youtube.com/watch?v=3Um_xMmE8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