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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전쟁

사유하지 않는 본능만 남은 동물의 행위

by 제주 아빠

* The New York Times의 기자 Brent Renaud. 우크라이나 전쟁을 취재하던 중 러시아군의 총에 맞아 사망.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사진은 구글에서 다운로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한창이다. 장교라는 신분으로 전쟁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조금은 껄끄러운 면이 있다. 전쟁이 곧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을 준수해야 한다는 공무원 행동강령의 영향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또 다른 정치적 수단이라고 하였고, 상대방에게 나의 의지를 강요하는 폭력행위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전쟁은 곧 정치이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대한 언급은 곧 정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칸트의 이성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정치적 입장이 아닌 인간 본연에 대한 분석을 해보려고 한다. 이것은 곧 신현실주의를 주장한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왈츠의 세 가지 이미지(혹은 분석 수준)를 이용하여 전쟁을 분석하는 것 중 국내 정치와 국제 체제라고 하는 이미지를 제외하고 개인이라고 하는 인간에 오롯이 시선을 맞추고자 함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사실상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개인의 전쟁이다. 전쟁이라고 하는 끔찍한 실상이 개인의 탐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고, 이것은 그의 세계를 향한 도발이며,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 칸트는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심미적인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어느 정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 그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만 비로소 동물과는 다른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본능적인 필요(needs)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요구(demand)를 넘어 욕망(desire)을 갖게 된다. 이 욕망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곧 인류의 발전을 가져왔다. 욕망은 인간 사회에 있어 선한 영향력을 갖는 것을 욕망이라고 한다.


가령 한 인간이 본능적인 성욕과 그를 해결하기 위한 타인(others)을 요구한다. 하지만 타인과의 존재성을 통해서 그 요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하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이고 사랑 주고 사랑받는 행위가 숭고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가정을 이루고 사회가 이어진다. 물론 본능적인 성욕이 곧 사회를 이루는 근간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본능적인 성욕이 올바르게 요구되고 욕망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을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타인과의 관계성을 무시한 채 자신을 위해서만 오롯이 요구될 때 우리는 그것을 탐욕(greed)라고 부른다. 탐욕은 곧 폭력과 착취를 부른다. 타인에 대한 착취, 자기에 대한 착취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정치대학원에서 안보전략을 전공한 나로서는 수많은 국제정치학 이론을 배우면서도 해결되지 않은 전쟁의 원인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그것을 정치학적 이론으로 찾으려고만 했기 때문이었다. 철학으로 인문학으로 눈을 돌리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전쟁의 이론이 아무리 거창하더라도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 본연의 존재와 이성에 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케네스 왈츠는 세 가지 이미지에서 개인의 수준에 대해 언급하였으나 이것이 과연 결정적인 원인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반대로 그것이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21세기 통신 수단의 발전으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소셜미디어의 등장이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서 깨닫게 하는데 의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을 깨달은 인간이 더 많은 이 세상에서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발발한 이상 그것을 좌시할 수 없는 인간들의 이성적 행위가 지금 언론에서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이다.


다시 돌아가서 전쟁은 왜 나는 것일까? 국제정치학적 이론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결론은 전쟁은 전쟁을 일으키는 어떠한 행위자가 있는데 이 행위자가 바로 전쟁의 주체다. 리바이어던과 같이 존재하는 국가는 사실상 행위자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쟁을 국민투표로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할 때 당시 일본의 수뇌부가 국민투표에 부쳐 50% 이상의 찬성에 의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고 그보다 더 오래된 고대 전쟁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국가라고 하는 리바이어던 뒤에 숨은 권력자와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어떠한 권력 집단에 의한 결정이 곧 전쟁의 원인이었다. 결국 모든 전쟁은 개인이 일으킨 것이다. 그 개인이 국내 정치, 국제 체제 등을 명분 삼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비겁한 선전 뒤에 숨어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일으키는 것이 전쟁인 것이다. 이 탐욕은 욕망은 있으나 이 욕망을 이성적으로 제어할 역량(competency)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동물적 본능에 불과하다. 물론 그 욕망 역시 선한 영향력이 아님은 두말하면 잔소리. 잘못된 욕망인 것이다.


푸틴은 그의 논문 등을 통해 꾸준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민족적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개인적 수준에서의 탐욕이다. 사실 슬라브 민족의 발원지는 지금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다. 러시아는 그곳에서 시작되어 뻗어나간 일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키이우가 없는 러시아는 근본 없는 국가라고 생각하는 게 그들의 입장이며, 그들은 그것이 곧 정통성이 없다는 그들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선전이고 불안감이다. 21세기 유럽의 동부에서 민족주의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를 따지고 들었다면 아프리카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미국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민족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결국 그 역시 리바이어던에 불과하고 마치 나치가 인종학적 이유로 유대인을 탄압하였듯이 범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주장하는 것은 나치의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그렇기에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두려워 우리는 항상 공동체를 만들곤 한다. 가족이 가장 우선이 되겠지만 그 외에도 피부색이 같은지, 같은 지역 출신인지, 같은 민족인지를 따진다. 외에도 학연, 지연, 혈연, 직연에 심지어 종교가 같은지까지 따져서라도 반드시 공동체로 존재하고자 한다. 그래야지만 안심된다. 하지만 이는 동물적 본능에 불과하다.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절대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자 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동체 이외의 존재들은 모두 나를 혹은 우리를 공격하고자 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심지어 어떠한 국제정치 이론은 오히려 이성적이기 때문에 타인을 공격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온 국가가 그렇게 속고 있고 체면에 걸린 것 마냥 이성을 잃은 나라가 전 세계에 몇 있는데 대표적인 나라가 북한이다. 러시아는 다행히 그런 나라는 아니다. 그러니 매일 같이 3,000명이 넘는 사람이 반전 시위로 잡혀가는 상황이 생기고 있다.


이 전쟁은 오직 푸틴의 개인적 탐욕, 범슬라브의 민족적 결합과 영토의 결합이라는 선전과 더불어 경제적, 정치적인 탐욕을 채우기 위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그를 지원하는 관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중 진심으로 푸틴에 충성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푸틴이 하사하는 봉급(고위직 군인 중엔 초호화 요트를 소유한 사람도 있다.)과 알량한 권력이라고 하는 개인적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걔 중엔 푸틴의 이상과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는 군인도 있겠으나, 그 역시 앞서 말한 푸틴의 탐욕과 같은 탐욕에 불과하다. 과거 이성적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국가라고 하는 리바이어던에 속아서 혹은 왕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하는 깨달음에 의함이 아닌 그저 강요와 복종에 의함으로 전쟁에 참여하였지만 21세기의 지구 시민들은 그렇지 않다. 그 전쟁의 명분이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심미안이 생겼다. 아니, 전쟁 자체가 명분 없는 정치의 또 다른 수단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전쟁의 참상을 소셜미디어가 실시간으로 중계하기에 이르렀고 국가가 가진 하드파워 외교, 정보, 군사, 경제와 무관하게 이성적 인간으로 존재하는 본인의 신념에 의해 참전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닌 전사들이 우크라이나 땅 위에 서게 된 것이다. 기존의 국제정치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단순히 민족주의적 입장이나 지정학적 입장(흑해와 세바스토폴, 크림 반도 등), 지경학적 입장(가스관, 석유, 세계의 빵공장 등)으로만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푸틴의 프로파간다에 속지 않는 이성적 인간들이 도처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에서 나 역시 나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한다. 자녀들에게 지금의 전쟁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줘야 할지 생각한다. 그리고 장교로서 군사적인 입장으로만 이 전쟁을 바라볼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우리 모두 사유하는 인간이다. 이성적 존재로서 나의 본질을 찾아 헤맨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가 가져온 폐해와 속임수에 눈뜬 존재로서의 인간이 진정한 심미안적 가치에 눈을 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사랑이다. 전 세계가 연대하여 사랑하게 된 것이다.


현생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다. 사람속(屬, genus)의 한 종이다. 원래 사람속에는 네안데르탈인도 있었다. 발굴된 표본에 의하면 그들이 호모 사피엔스보다 뇌도 더 컸고 힘도 더 세고 컸으나 이성적 존재로서 존재하지 못하여 멸종했다고 한다. 사람속은 결국 다른 유인원들과 다르게 유일한 종을 갖고 있게 되었다. 결국 이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상에 유일한 사람속 사피엔스종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이성 덕분이니 지금 이성적이지 못한 푸틴을 보며 혹시 그는 지구에 마지막 남은 네안데르탈인의 후예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사피엔스에게는 약 1~4% 수준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남아있다고 하는데(여담이지만 비만의 원인) 푸틴은 조금 더 많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 한 99%...? 여하튼 결론적으로 이 전쟁이 어서 끝나길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기쁨의 희열을 느낀다. 깨달은 인간. 이성적 인간. 칸트가 말한 초월적 사고와 그 초월적 인간이 더 많아진 세상이 도래했다. 사유하는 인간의 세상인 것이다.


전쟁이 한 때 또 다른 정치적 수단이었던 때가 있었다. 사실 여전히 전쟁은 수단으로써 유효하다. 또한 일부 권위주의적 체제하에 놓인 사유하지 못하는 인간 세상, 사람속 아래 사피엔스(현명하다는 뜻이다.) 종이 아닌 농 사피엔스(nonsapiens. 현명하지 못한) 종이 신생 인류로 이 시대에 진화가 아닌 퇴화를 선택하여 공존하고 있다. 그들을 퇴화하게 만든 것 역시 권위주의 체제하의 권력자들이 그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려 이 또 다른 종을 생산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여전히 수단으로 유효하고 군대가 필요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나는 높은 수준의 봉급을 받고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다. 철학하는 장교로서 사피엔스만 존재하는 세상을 꿈꾸지만 농 사피엔스로부터 사피엔스를 지켜야 할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피엔스로의 진화는 자유가 필요하다고 또 한 번 깨닫는다. 자유는 인간을 사유하게 한다. 주어진 자유를 올바르게 이용하여 사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교육의 부재가 원인이다. 또한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1차적으로는 가정의 책임이고, 2차적으로는 국가적 책임이라고 할 것이다. 더욱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진화하게 둬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더욱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해야 한다.


중국 인민의 해방을 위해 책을 쓴 빌 거츠는 '하늘 속이기'라는 책을 통해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자유를 상실한 채 본능만을 추구하게 만드는 소수의 권력자들의 전략적 지배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 역시 알고 보면 이성적 존재로서 심미안을 가진 인간의 본질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의 호의호식만을 추구하는 본능적 존재로서만 남아있는 21세기 네안데르탈인(혹은 농 사피엔스)이 아닐까. 이 순간 칸트의 인간에 대한 존재를 표현한 명문장이나,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의 삶의 목적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랄프 왈도 에머슨의 '성공'이라는 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사유하는 인간으로 존재하고, 철학하는 장교로서 전쟁을 대비한다. 자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성적 인간으로서 마음껏 나의 사랑하는 존재인 아내를 욕망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나라는 존재를 느끼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더불어 푸틴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칸트의 정언명령을 들려주고 싶다. "Люди рациональны."


* 이 글은 오직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에 대한 관점으로 쓴 글이며, 러시아의 국내 정치, 우크라이나 국내 정치나 국제 체제 속에서의 양국의 전쟁에 대한 평가가 결코 아님을 밝힙니다. 더불어 마지막 문장은 파파고로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를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으로 저는 러시아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장이 맞고 틀리고는 모르겠습니다. 발음은 대략 '루제르 싸날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해석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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