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밤 달 아래 여름이 아쉬운 아이들의 웃음과 놀이가 끊이지 않습니다. 한창 날씨 좋은 이맘때 아이들도 늦은 시간까지 설레나 봅니다. 분명 해는 짧아졌는데 아직 밤늦도록 놀기에 너무 좋으니까요.
이국적(異國的)이다. 그 모양새가 우리나라 같지 않고 다른 나라 같을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여러 이유로 인해 이국적이라고 느끼곤 하는데 자연경관이 이국적인 경우도 있고 건축물 양식이 이국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에 묘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것 같아 쓰기가 꺼려진다. 대한민국은 헌법상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포함하는 꽤나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세로로 긴 편이라서 가장 북쪽과 가장 남쪽의 거리가 무려 1,140여 km에 달한다. (함경북도 북단에서 마라도까지) 함경도의 북단은 북위 43도 수준이고 마라도는 북위 33도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북쪽의 추위와 가장 남쪽의 따뜻함을 모두 보유한 게 우리나라다. 하지만 북위 37도에 사는 서울 사람들은 37도만이 우리나라인 줄 안다. 그러다 보니 43도의 추위도 33도의 따스함도 모두 그들에겐 '이국적'일뿐이다. 이 용어는 정확히는 이국보다는 이시적(異市的)이 맞는 것 같다. 저기에서의 시는 서울시다.
어릴 때 교과서에서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고 배운다. 뚜렷한 사계절이 아름다운 나라. 반복적으로 배우고 시험에도 나오는 우리나라 기후의 특성은 모두 서울을 기준으로 한다. 지리적으로 중위도 온대성 기후에 속한다고 배웠고 봄과 가을은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맑고 건조하고, 여름은 고온 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습하고 더운 날씨를 보인다고 한다. 겨울은 한랭 건조한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춥고 건조하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이국적이라는 단어가 생긴 게 아닐까 싶다. 이국이면 이국이고 우리나라면 우리나라지 이국적이랄 건 뭐람. 독일의 기상학자 쾨펜의 기후 구분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온대습윤, 온대동계건조, 냉대기후가 모두 나타난다.
우도에 가니 아직 여름의 기운이 남아 뭉게구름도 더러 보인다. 푸르른 잔디와 파란 하늘 앞으로 기분좋게 뛰노는 아이들 모두 아직 여름이 아쉬워 보인다.
긴 서두를 꺼낸 것은 제주의 가을을 소개하면서 이국적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제주만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어서다. 제주의 가을은 제주만의 제주다운 아름다움을 지녔다. 유난히 길고 덥고 습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해주는 푸르른 여름을 지나고 나면 10월~11월쯤에 계절의 여왕이라는 가을이 제주를 기웃댄다. 제주의 여름은 길다. 본토가 이미 가을이 시작될 때 제주는 여전히 여름이라 바닷가에 수영하는 사람도 더러 있고 낮은 뜨겁다. 육지에서는 가을이 온다는 것을 몇 가지 외향의 변화로 느끼곤 한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변한다. 반팔로는 아침, 밤 차가워진 기온을 견디기 어려워서 긴 소매가 보인다. 겉옷으로 니트나 스웨터도 종종 눈에 띄고 바람막이 같은 여벌의 겉옷을 챙기기도 한다. 나무는 여름내 푸르렀던 나뭇잎을 내려놓고 알록달록 색이 변해간다. 초록이 여름이라면 가을은 주황이다. 노랗고 빨간 잎들이 뒤섞여 주황빛으로 물들인다.
제주에서는 지평선, 수평선까지 이어진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보며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대다수 식생이 사시사철 푸른 나무인 데다가 외래종인 야자수 등으로 인해 단풍, 은행 등은 보기 어렵다. 한라산 중턱에 조금 눈에 띌 뿐이다. 제주 어디서나 한라산이 보이므로 어렴풋이 보이는 나뭇잎 색깔의 변화로 가을을 알 수 있겠지만 사실 높은 산의 기상과 사람들이 보통 거주하는 해안~중산간의 기상은 다르기 때문에 여전히 마을은 늦여름에 가깝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하늘의 변화가 날 설레게 한다. 습도가 높은 섬 특유의 날씨로 여름 제주는 뭉게뭉게 우주까지 닿을 것 같은 거대한 구름들이 먼바다에서 섬까지 무리 지어 다니지만 가을이 되면 그렇게 커다랗고 깨끗한 하얀 구름 떼가 온데간데 사라지고 우주 시작점까지 보이는 선명하고 푸른 하늘만 남는다. 더러 구름이 있어도 높은 하늘에 넓게 깔린 단층의 구름이다. 하늘만 보고 있으면 추울 지경이다. '시리도록 파란'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아마 가을의 하늘을 보며 스산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시려 보이는 하늘과 다르게 지상의 기온은 아직 덥거나 따스하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산책하기, 오름 오르기 등 바깥활동이 하기 가장 좋은 날씨가 이어진다. 이 시기 제주는 정말 예쁨 그 자체다.
정말 시리도록 파란 하늘 하지만 여전히 땡볕인게 제주의 가을. 아이들의 복장과 땀흘리며 노는 열기에서 여름이 남아있지만 그너머 구름은 전형전인 가을의 그것이다.
제주도는 배 아니면 비행기 두 가지 운송 수단으로만 올 수 있다. 아직도 어린아이들은 본토를 대한민국으로 제주도를 제주로 별도로 구분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 중엔 비행기를 타고 육지에 가면 대한민국에 왔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제주도는 꼭 다른 나라 같으니 제주도 사는 사람들은 육지가 이국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오만도 없다. 가을을 느끼는 방법 역시 모두가 단풍과 은행을 보며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도 하고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도 한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라고도 하고 단풍 구경가야 하는 계절이라고도 한다. 각자가 느끼는 가을이 있다. 심지어 적도 부근에서도 가을이라는 계절은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을과 다를지 모르겠지만.
제주에서 느끼는 가을을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을이라고 하지 않겠다. 제주만의 가을. 제주의 가을이다. 제주어로 가을을 쓸 때는 ㄱ에 아래아를 붙여 쓴다. 가을, 고을 정도로 발음할 수 있고 심지어 을 대신 삼각형 모양의 여린 시옷을 쓰기도 해서 가슬이기도 한다. 조금 다른 발음과 다른 표기법을 가졌다고 해서 이국이라고 치부하기엔 제주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도 사랑하는 섬이다. 이국적이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제주만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길 바란다. 제주도민들도 스스로 이국적인 제주의 경치를 자랑하기보다 제주만의 아름다움이라고 힘주어 말해야겠다. 각자의 가을이 온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가을을 맞이 한다. 여름내 푸르렀던 귤도 점점 황금색으로 변해간다. 한라산 뒤로 지는 태양의 붉음을 품었다. 아름다운 제주만의 가을. 단풍이 없다고 아쉬워할게 아니라 제주만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더 사랑해야겠다. 그렇다고 단풍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이다. 관음사 코스의 한라산 탐방로는 가을철 최고의 단풍 경치를 자랑한다. 오히려 제주는 한반도 모든 기후를 대표한다. 곧 겨울엔 함경도의 추위가 백록담에서 불어올 것이며, 육지에서는 좀체 흉내 낼 수 없는 제주의 봄과 여름이 올 내년을 기대하며, 나만의 가을을 제주에서 보낸다.
가을 되난 산도록한 보름이 잘도 좋다. 하늘이 막 고운 게 마씸. 일교차가 크난 고뿔 들리지 않게 조심합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아래 한라산의 실루엣이 선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푸르른 나무들을 보며 가을인지 여름인지 내 마음은 설레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