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리마
누군가에겐 음절 조합만으로도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단어이려나. 어제 받았던 단어인데 인상적이어서 오늘 시간이 난 김에 써본다.
나의 살던 고향엔… 그곳엔 마당을 나가면 소가 울고 밭에서 파나 양파 따위를 뽑아다 먹었으며 버스를 타러 어린 시절의 작은 보폭으로 20분은 족히 걸어나가야 정류장을 만날수 있었던. 그렇다고 인터-네트다, 티-브이다 하는 신문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문명과 동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 지리적 특성상 벌레가 그렇게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이 그리마라는 놈은 태생이 음습한 곳을 좋아하는지라, 하필이면 부엌 옆으로 딸린 방의 가장 안쪽에 놓인 컴퓨터 책상 아래가 그놈의 주 서식지였다. 다리가 많은 만큼 잽싸기도 해서 먼지가 쌓인 멀티탭 사이사이를 슈룩- 소리가 나도록 지나가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어딘가에서 와 또 어딘가로 사라지는 그리마를 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다소곳이 다리를 접어 의자 위로 포개어두거나 "할머니-!" 하는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를 내지를 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신기한 것은 기를 쓰고 기억하려 해도 이제는 흐릿해진 그 '고향'집이 그리마라는 놈을 떠올리면서 함께 불쑥 불쑥 떠오른다는 것이다. 누우런 합성피혁이 씌워진 의자, 찐득한 장판과 거뭇하게 그을린 아랫목, 어린 나이에도 정말 못났다고 생각했던 파란 타일의 화장실, 손님방에 있던 검칠된 장롱과 눅진 합판의 냄새, 할아버지 몰래 (아니 실은 뻔히 알고 계셨지만) 100원짜리, 500원짜리를 슬쩍 꺼내가곤 했던 안방의 화장대…
추억은 어디엔가 깊숙히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분자들처럼 우리 주위에 떠다니는 것만 같다. 그리고 딱 하나, 그 존재는 하나 포착할 수 없는 추억들을 포집해줄 딱 하나의 요소가 있으면, 그것은 사위의 추억들을 한 데 모아 그 장면과 그 시간과 그 냄새며 온도며 하는 것들을 재생해주는 셈이다.
조금… 많이 징글징글하게 생겼지만, 그리마를 덮어놓고 미워할 수는 없겠구나. 얼마간에든 더 징그러워도 좋으니, 나의 살던 고향을 재생시켜줄 이런 요소가 더욱 많아졌으면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