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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런 Aug 26. 2020

흉터와 가르마

나의 오랜 상처와 마주하기

계속 코로나 블루에 젖어 있을 순 없다 싶어 얼마 전부터 스스로를 정돈할 요량으로 아침 걷기도 하고, 나쁜 음식도 줄이고, 좋은 책을 골라 읽고, 글도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뭔가를 빠트린듯한 찝찝함이 항상 있었는데  며칠 전에서야 미궁의 한 가닥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밀림 마냥 울창해진 머리카락-

마지막으로 미용실을 다녀온 지 1년 반을 넘긴 나는 칼만 들면 망나니가 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으로 진화한 상태였다. 등의 1/2을 덮어버리는 길이와 무게는 감고, 말리고, 동여맬 때마다 관리 허용치를 넘어선 불편과 짜증을 야기하고 있었다.

외양을 다듬는 것이 목적은 아닐 것이나 심신을 다듬기 위한 과정이자 수단일 터. 정돈을 위한 작은 실천 중 하나라 여기고 아침 일찍 동네 미용실로 행차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냐는 질문에 '귀밑 3cm.'를 외쳤더니 디자이너는 좀 더 디테일한 설명을 요구했다.

'실은 빡빡 대머리를 하고 싶은데 그게 관리가 더 어렵다더라. 머리 감은 뒤 손질 안 해도 단정해 보이는, 최대한 짧고 가벼우면서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알아서 잘해달라.'라고 조금 더 디테일하게 말했더니 두어 가지 단발 스타일을 제안했다. 날 보며 최초로 떠올렸던 것이 최선이겠거니 추측하면서 그가 처음 추천했던 똑 단발이란 것에 ok 사인을 하였다.


디자이너 눈에는 이때부터 내가 미린이(미용(실)+어린이=미용 초짜)로 보인 모양이었다. 아직 포기(?) 할 때가 아닌데도  가꾸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헤어 관리법에 대한 팁들을 몰라서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묻지 않아도 계속 이야기해주었다.

관심도 없고, 알고 있어도 귀찮아 실천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리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린이를 챙기려는 마음이 갸륵하고 그 성의가 고마워 새겨듣는 듯이 추임새도 넣고, 눈동자를 크게 뜨면서 열심히 반응했다.

그러면 그는 또 날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듯 더 상세 설명을 붙였는데, 들어올 때 입 안으로 넘기던 김밥을 덮어두며 허겁지겁 내게 다가오던 것이 생각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렇게 에너지를 계속 빼다간 저 앙상한 몸이 견디겠나' 싶었다. 그가 말을 끝낸 뒤 한 템포 쉬어가려 할 때쯤 잡지를 갖다 달라 요청함으로써 넘치는 배려의 물살을 제방 해보려 하였다.

내가 기사들을 읽기 시작하자 그는 잠자코 하던 일을 이어나갔다. 그럼에도 이거 하나만은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나의 왼쪽 가르마에 대한 설명을 이내 꺼내 들었다.

-이쪽으로 오래 가르마를 하셨죠? 가르마도 한 번씩 바꿔주셔야 해요. 가르마 부분의 뿌리 모발이 살지가 않고, 머리카락도 잘 빠지거든요. 이참에 제가 반대편으로 바꿔서 스타일링해드릴까요?




그러고 보니 가르마를 바꿔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르마의 방향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언니, 오빠들과 방 안에서 빙빙 돌며 술래잡기를 하다가 넘어졌는데 하필 아버지의 유리 재떨이에 눈가를 찢겨 여러 바늘 꿰맨 흉터 때문에 그것을 가리느라 방향이 정해진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 흉터가 무척 아파서 생긴 것을 의미할 뿐이었지만 '딸아이 얼굴에 흉이 졌다'며 매번 한숨짓는 어머니를 통해 내게 뭔가 큰 '하자'가 생긴 것이로구나 짐작하게 되었다.

짐작 이후라 해도 천둥벌거숭이 마냥 뛰어노는 것이 좋은 꼬맹이였으니 금세 '하자'가 있음을 잊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머리를 다시 매만져 흉터를 가리는 것으로 나의 '하자'를 더욱 부각하곤 하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정체성을 애써 만들어내 방어했던 것 같다. 흉터가 좀 있으면 어때? 하는 당찬 정면승부가 아니라 내가 하자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계속 확인해야 하는 것이 괴로우니 더 이상 확인할 수 없도록 외모에 신경 쓰는 자아 따위는 버리겠다 하는 부분적 소멸을 지향했다. 그래서 가르마가 계속 흉터를 가리는 왼쪽으로 고정되었어도 ' 나하곤 이제 상관없는 분야야. 그러니 바꾸고 말고 할 필요도 없어'하며 가르마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고, 그것은 잊힌 채로 쭉 이어져 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왜곡되는 것에 맞서기엔 무기력했고, 여러 번 그어진 생채기를 보듬을 줄 몰랐지만 어떻게든 아물어 버리길, 사라져 버리길 바랐던 것 같다.




나는 즉시 잡지를 덮고, 얼굴을 들어 지금 가르마를 바꿔야겠으니 매만져 달라고 말했다.

디자이너는 8:2, 6:4 등으로 가늠해보더니 적당한 포인트를 찾아 오른쪽 머릿 더미를 왼쪽으로 넘겼다. 머리 뿌리들의 탄력과 관성이 어찌나 강한지 불룩한 능선이 생겼다. 반대편으로 넘어가 본 적이 없는 머릿 더미들은 이내 앞으로 우르르 쓰러져 내 얼굴을 덮었다. 그러면 그는 드라이기를 이용해 앞머리를 둑처럼 세워쌓았고, 고정되는듯하다가 다시 쓰러지곤 했지만 손길이 더해지면서 점차 오른쪽 가르마가 새롭게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자 평생 외면당하기만 했던 오른쪽 눈가의 흉터가 훤하게 드러났다. 처음으로 자세히 눈길로 더듬어 보았다. 볕이나 바람을 쐬게 해 준 적도 없는데 수십 년간 풍화된 돌 마냥 색상도 모양도 희미해졌다. 눈 끝매로 이어지는 부분은 웃을 때 휘어지는 눈꼬리처럼 변해있어 인상이 도리어 선해 보이도록 한몫 거들고 있었다. 못난 주인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목구비들과 조화를 이루며 잘 살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미안하면서도 기특하여 순간 뭉클해졌다.   


미션을 성공적으로 마친 디자이너는 가르마를 바꾼 뒤 또 그대로 두지 말고 정기적으로 방향을 바꾸란 당부를  내게 간곡히 전했다.

나 역시 그에게 감동스러운 배려를 해주어 고맙다고 간곡히 말했다. 내게 흉터도 가르마란 것도 있었으며, 숨거나 덮어야 할 의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들을 없는 셈 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바꾸면 된다 사실을 알려준 것에 고맙노라 몇 번을 속으로 되뇌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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