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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런 Aug 21. 2020

걷고 마시고 사랑하라

지금의 공기를 느끼기



내가 굳이 아침 '산책'이나 아침 '운동'이라 하지 않고 '아침 걷기'라고 칭하는 까닭은 산책이라 하기엔 덜 정신적이고, 운동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느슨한 패턴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쭉 해왔던 나의 '산책'은 주로 풀리지 않는 문제, 이해되지 않는 사건, 기분 전환의 필요성 등등 불확실한 것들과 상황에 마주쳤을 때 어슬렁어슬렁 서식지를 빠져나오는 게릴라 식 비상구의 개념이었다.  불안이나 갈등에 허우적댈 때면 벗어나려는 에너지가 걷는 거리에 비례하여 어느새 멀리 나오게 되는 때도 있긴 했으나 주로 회사나 집 주변의 제한된 장소 내에서 맴돌았기에 몸이 연소시킬만한 것은 미미한 정도였다. 정신적 해갈과 정돈의 용도였으므로 몸이 걷지만 머리가 더 많이 운동하는 격이었다.


'운동'이란 것은 의도한 적은 없지만 고질적으로 터부시 되는 영역이었다.

뼈 빼고 다 빼준다는 말에 혹해 회원권을 끊기만 하고 숙취 때문에 변기 앞에서 위액을 빼내기 바쁘다거나, 요가하러 들어가서는 요가 중 잠깐의 명상이 맘에 들어 다시 명상 강좌를 뒤지는 등, 매번 삼천포로 빠지는 통에 몸을 움직여 땀을 빼 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온 내가 기초대사량을 늘려야겠다며 아침 시간을 콕 집어 걷기로 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격렬한 움직임의 세계로 들어선 것은 분명하지만, 근육량이나 체지방의 가시적 변화를 가져오는 정도는 아니며 호모 에렉투스임을 확인하는 간질간질한 수준인지라 운동이라 칭하기가 남부끄럽다. 그래서 감히, 양심상 아침 '운동'이란 단어는 버리기로 한 셈이다.




사실 처음엔 내친김에 제대로 해보자 싶어 나름의 목표와 구체적인 방법까지 조목조목 세웠더랬다.

해봤자 끝이 없는 고뇌(?)는 잠시 삭제하고 몸만 움직이자!  매일 아침 30분 이상, 5000보 이상을 걸어 1달에 몸무게 1kg 이상을 줄 여보는 거 쥐! 워밍업으로 20분 걷다가 1분 빨리 걷고 1분 보통 걷고, 2분 빨리 2분 보통, 3분 빨리 3분 보통, 다시 2분 빨리 2분 보통, 1분 빨리 1분 보통, 1분 아주 빨리 걷기, 쿨 다운 과정의 인터벌 트레이닝! 정해진 방법으로 돌진 돌진 돌진, 돌진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자꾸자꾸, 매일매일 발목이 잡혔다.

흘러가는 구름 모양이 예술이라 이대로 숲 속으로 들어가기가 아깝다거나, 터줏대감 길냥이가 새끼를 낳아 제 마당에 풀어놓았는데 깡충깡충 뛰노는 그 꼬물이들을 차마 지나치기 힘든 것들 말이다. 이름 모를 새의 청아한 목소리라도 울려 퍼지면 나의 방정으로 날아가 버릴까 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경청하는 거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몹시 잔잔해졌다. 


나는 분 단위로 강약을 가미하던 걸음을 그만두기로 했다. 타이머가 돌아가는 휴대폰은 주머니에 쑤셔 넣어 버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수풀 사이로 빼꼼히 나를 쳐다보는 금계국이 보인다. 전투적이던 자세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결국 포기하고 말 것이라 관성이 속닥속닥 위협했지만 삶이 너무 숨 가쁠 것 같아 거북하였다. 본래의 목적은 아침 시간을 할애하여 몸을 움직여보자 였으므로 내가 좀 더 기쁠 수 있는 방식으로 걷거나 뛰어야겠다 생각했다.  해야 할 것들에 대한 고민 따위도 그만 부르고, 오직 지금의 공기를 느끼며 오감으로 전달되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걸어야겠다 싶었다.


바람을 타듯 팔랑팔랑 팔과 다리를 흩트렸다. 그러곤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개들을 훈계하듯 달래고 변명하는 주인들의 난처함과  뽕짝에 발맞추어 걷는 할아버지의 활기를 지켜보았다. 유채나물을 어떻게 하면 맛있는지 논하는 모녀의 대화도 엿듣고, 여름에 찬물을 마시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노부부의 승부도 가늠해 보았다.

오래 보고 싶으면 천천히 걷고 잘 안 들리면 빠르게 쫓아가서 들었다. 마스크 안에서 펄렁거리는 콧구멍과 꽉 깨무는 아랫입술, 씰룩이는 광대뼈가 시시때때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나의 불안을 꽁무니에 주렁주렁 달고 몸만 시간에 맞추었던 이전과 달리 주변을 지그시 살펴보는 지금의 행위는 마음의 여유를  넓혀주어 울렁이는 감정을 조금 더 지켜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른 아침의 선선한 기운이 증발하고 서서히 따끈해지는 햇빛이 종아리를 달구기 시작했다. 나는 시계를 꺼내지 않고,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을 정했다. 이전보다 더 오래, 멀리 걸어 귀가하는데 난항이 있었지만 뭔가 큰 짐을 던 듯 마음이 훨씬 가뿐하고 개운했다. 마음이 가벼우니 기분마저 좋아져서 비타민제 광고에서 듣던 활력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성공치보다 행복 치를 잡은 자기 선택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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