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의 아침 공기던가. 눅눅하고 육중한 장마철의 기운을 싣고 있어도 기분만은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으니 아침 공기의 위상은 이런 건가 보다.
걷기를 그리 오래 거르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뭔가가 꽤 달라졌다. 물기를 너무 많이 머금어서 그런지 풀과 나무들은 더 짙어지고 우람해 보였다. 곳곳에 애기 버섯과 밀버섯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항시 시끄럽던 참새와 까치 무리들은 어디 가서 떨고 있는지 조용하다.
변화를 감지하고 보니 숲길에 살고 있는 고양이 3 가족들도 안녕한지 궁금해졌다. 움직임이 둔하고 늘 스티로폼 위에 앉아있곤 하는 늙은 흰 고양이, 기운 넘치는 새끼 3마리를 단속하기 바쁜 노랑 고양이네, 얼마 전 몸을 풀어 뱃가죽이 흐물흐물해진 도서관 검정고양이까지.. 사람으로 치면 독거노인에 모자가정이다 보니 지난밤 호우경보는 잘 이겨냈는지, 장기간 장마로 배를 곪은 건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아파트 정원을 돌다 비가 오면 집으로 뛰어들어갈 계획이었지만 숲길을 다녀오는 것으로 경로를 바꾸기로 하고 숲길 입구로 통하는 도로변까지 나왔다. 그때 투둑 빗방울이 얼굴과 어깨에 떨어졌다. 툭툭 투둑 굵게 몇 방울 더 내리더니 이내 시야를 덮을 정도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곧장 뒤돌아 뛰어 좀 전에 지나쳤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사서 숲이든 집이든 되돌아 나갈까 했으나 땅을 후려치는 폭우를 뚫고 편도 10분 거리를 나서기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기다 에어컨 냄새와 음식 냄새 같은 것이 묘하게 섞인 편의점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보니 좀 전부터 느껴지던 허기가 더 격렬해져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빗발이 약해질 때까지 약간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며 머무르기로 했다.
눈치 보지 않고 여유 있게 머무르려면 한방의 먹부림으로 끝나버리는 음식은 젖혀야 한다. 조리하는 시간까지 겹쳐 시간이 더 걸리는 음식으로 낙점된 것은 컵라면. 뜨거운 물을 붓고 3-4분 기다린 뒤, 후후 불어 입천장 까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먹으려면 10~15분 소요. 그 정도면 비구름도 비어버려 더 이상 퍼부을 비도 없을 거야.. 혼자 만족스러운 계산을 하고 가까스로 라면을 골랐다. 어느 유명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인 짬뽕이었는데 허무하게 몇 젓가락으로 끝나버렸다.
비는 아까보다 더 세차게 내린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려니 머쓱해졌다. 뭐라도 하나 더 사서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아까 선택하지 못한 라면이 눈에 아른거렸다. 아.. 라면... 그게 뭐라고 굶던 아이가 고봉밥 앞에서 허겁지겁 식탐을 부리듯 애타게 갈구하고 있는지 애석해진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에게 건강한 입맛을 새겨주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의 이미지를 유지하려 그동안 모른 척 배신했던 라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타고난 정크푸드 면순이 주제에 신분 세탁하겠다고 얼마나 발버둥 쳤던가.. 갑자기 목이 매여온다. 정체성을 되새기고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오늘만은 배신 말자! 오늘만은 나를 찾자! 나는 비장한 마음을 부여잡고 사발면을 계산대에 올렸다.
아르바이트생이 다시 내 얼굴을 바라본다. 아침 댓바람부터 컵라면 먹어놓고 또 먹냐는 뜻인 거 말 안 해도 안다. 해석하지 마. 그냥 물건이나 계산해 줘. 격앙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하자 그가 영혼 없이 말했다.
-이거 2+1 행사여서 2개 사시면 하나 더 주는데 그렇게 사시겠어요?
암요, 자릿세는 넉넉히 내고 찌그러져 있으리다. 나는 곧장 2개를 더 가져와 계산하였고 하나는 뜯어 뜨거운 물을 부어올렸다.
3분이 지난 뒤 면발을 한 입 후룩 넘기고 보니 밀가루 내가 훅 올라오면서 속이 역해졌다. 아.. 한때 2+1봉지도 클리어했던 내가 이제 이깟 컵라면 2개를 넘어서지 못한다니...
성년부 중래(盛年不重來) 일일 난 재신(一日難再晨)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이 두 번 오기 어렵다네-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 앞에서 젓가락을 사발면에 꽂은 채 한물 간 나의 내장을 생각하며 탄식하였다.
면이 붇고 국물이 1/3쯤 줄어들자 비가 꽤나 약해졌다. 나의 여유시간은 이미 10분 초과하고 있었고, (코로나) 자가 검진과 온라인 수업을 준비해야 하는 아이들이 때를 놓치게 될까 봐 매우 초조해져 있었다. 고양이들은 나중에 들여다봐야겠다 싶어 들여놓을 고양이용 사료 캔을 여러 개 들고 다시 아르바이트생 앞으로 갔다. 물건을 확인하고 또다시 나를 본다. 이거 내가 먹을 거 아니야. 얼른 계산이나 해달라고. 소리 없는 외침을 담아 시선을 마주했더니 심드렁하게 묻는다.
-봉지 드려요?
남은 컵라면 2개와 사료 캔을 담자 봉지가 꽤나 불룩해졌다. 봉지 값을 드릴까요 물었더니 그냥 가세요 한다. 편의점에서 사치를 부린 데 대한 서비스일까, 아침을 라면으로 때우는 꾀죄죄한 몰골에 대한 연민일까 혼자 생각하다 다시 멈추었다.
아, 이 양반 자기 할 도리를 지키려는 심플한 노동자가 아니던가-
나 혼자 또 무슨 프레임을 씌우려는가-
쓸데없는 확장을 덜어내고 불룩한 검정 봉지를 산들산들 흔들며 가족의 아침을 준비하러 편의점 문을 나섰다.
그날 늦은 밤, 다시 들른 편의점에서 맥주를 4캔 샀고 갓 출근한 그 아르바이트생은 다시 봉지 드려요?라고 물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도 세찬 장맛비가 내려친다면 또 다른 사발면을 거리낌 없이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아 상상만으로도 개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