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런 Sep 11. 2020

악연 설정하기

패기는 왜 이다지도 빨리 닳는가

나는 동네 마트를 수시로 드나들며 내 냉장고처럼 사용하고 있다. 전기에너지를 줄이고, 집안일에 소모되는 노력까지 줄여주는 현명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요리하기를 스러워하는 똥손이다 보니 그 능력마저 도태되어 김치냉장고 같은 저장 장비 갖추지 않는다는 점이 보다 큰 이유다.

자주 드나드는 만큼 구입품목도 적어서 카트를 끄는 일은 드물고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이용한다. 이 바구니는 마트에서 제공하는 것이므로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은 뒤 바로 다른 바구니와 겹치도록 내려놓으면 된다.

앞서 이용한 사람들이 가지런히 겹쳐놓으면 문제가 없는데 손잡이를 위로 세워 놓는다든비스듬하도록 아무렇게나 놓는 자들이 가끔 있다. 바로 내 앞사람이 그렇게 해놓으면 일단 불쾌하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변기 물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를 목격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하지만 대체로 사소한 불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쪽이었으므로 큰 문제없이 지나가곤 했는데 그 날은.. 아마도 '그런 날'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1년에 딱 한번, 그런 날이 있다. 갑자기 개그 만랩이 되어 눈에 띄는 사람마다 허리 고꾸라지도록 웃겨 틀어진 척추도 조분조분 맞춰줄 수 있는 날. 부지런 포스가 넘쳐 방금 해외이사를 한 것도 아닌데 집안이 훤하도록 쓸고 닦아낼 수 있는 날.

적어도 1년 내에는 다시는 오지 않을 신기루와도 같은 초능력이 홀연히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런 날 말이다.

그런 날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앞사람이 바구니를 툭하고 던져놓고 지나가는 것을 그냥 두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보면.. 우렁찬 목소리로 불러 세워 행실을 조목조목 지적했던 것을 보면.. 동공에 횃불을 이글이글 켜놓고 옆 라인까지 지적한 것을 보면... 더 나아가 마트 직원에게 물품을 험하게 다루고 다른 고객에게 피해를 주는 고객은 고객도 아니라며 주의라도 주라는 식의 훈계 같은 조언을 줄줄이 뱉어낸 것을 보면...

이런 기운 왠지 익숙하여 기억을 더듬어 보니 혈기왕성한 20대 시절 한 지하철역 화장실이 떠오른다. 거울 앞에서 앞머리를 매만지던 여중생들이 들어간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담배연기가 뭉개 뭉개 피어올랐고 나는 일행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문을 두드려 아이들을 끌어내었다. 그리고 역시나 훈계 같은 조언을 줄줄이 뱉어냈었다. 놀이터에서 침을 뱉는 청소년 무리 앞에서 다소곳하게 눈을 내리깔던 내가 불의(?)에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은 적당히 들어간 알코올 덕이었을 텐데 나는 왜 맨 정신으로 들어간 마트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단 말인가.


나의 패기 어린 이의제기는 계산대 직원의 부드러운 수습으로 마무리되었다. 네, 손님. 저희도 한번 더 살피겠습니다. 뒤에도 손님이 오셨으니 계산 진행해드리겠습니다. (앞사람을 보며) 손님, 바구니 정리 한번 해주시고 가시죠?

앞사람은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로 비스듬했던 바구니를 다시 꽂았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그때까지도 '한 손만 더 써서 바르게 넣었으면 될 일 아니었냐'며 맘 속으로 불끈하였으나 좀 전의 충전 100%의 호기로움이 그새 상당량 소진되어 입 밖으로 꺼낼 여력은 없음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는 초능력이 희미해졌던지 큰소리를 낸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것을.. 마트 직원들에게 각인됐을지도 모를 내 존재감이 부담스러워졌고 좁은 동네라 뜬소문이라도 나는 건 아닌가 괜한 염려도 되었다. 당장 내일 두부라도 모자면 쪽팔림을 무릅쓰고 마트에 가야 할 텐데 냉장고에 여분의 두부가 있던가 생각하던 차에 지하 1층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런. 데.

신이란 존재는 핫바지 얼굴마담 바지사장인가.. 나보다 더 한가하고 권태로운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삼라만상을 다스리기에도 바쁜 이 시간에 온 우주 중, 그 안의 작은 별 지구 중, 그 안의 협소국 대한민국 중, 수도권 변두리 어드메에 짜져 있는 우주먼지와도 같은 나를 가지고 이런 장난을 칠 수 없다.

'이런 젠장'을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내 눈동자에 아까 앞자리 손님이 한가득 들어왔다. 마스크 때문에 표정은 정확히 읽을 순 없지만 그도 나도 미세한 파동을 흘리고 말았다.  

층수를 누르려 보니 이미 14층이 눌려져 있다. 나는 10층을 누른 뒤 등 뒤에 서있는 그를 의식하며 생각이 번잡해졌다.


'아까 너무 무안 줬던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그 부분은 사과를 할까? 아니 내가 왜? 양말짝 거꾸로 벗어놓은 제 가족한테도 잔소리할 사람이 자기 행동은 엉망이면 안 되는 거지- 그럼 앞으로 계속 이렇게 마주치자고?'


머릿속의 생각들이 정반합의 입장을 변화무쌍하게 굴리는 와중에 내 뱃속 골짜기에 꼴꼴꼴 물길이 휘돌아가는 소음이 숨소리 한번 크게 나지 않는 정적을 무참히 깨고 있었다.  이런 젠장... 엘리베이터 너무 느리다. 고장이 났나 싶게 너무나 천천히 기어올라가고 있다. 신은 정말로 핫바지 얼굴마담 바지사장인가...


억겁과도 같은 시간 한참 지난 뒤에야 엘리베이터는 날 뱉어낸  스르르 문을 닫아 버렸다.

이제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가 해명을 한다거나 사과를 하는 것도 이상한 단계로 건너오고 말았다. 악연만으로 점철된 이웃사촌으로 확정되었. 그에겐 내가 마트에서 대차게 따지고 들던 사람으로, 나에겐 그가 바구니를 아무렇게나 던져놓는 비매너인 사람으로 박제되는 순간이 방금 지나간 것이다.




초능력이 완벽하게 사라진 다음 날, 어김없이 평소의 쪼랩으로 돌아왔. 전날의 행동이 옳았나, 과했나 하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저 마주칠지도 모를 상황만이 날 불편하게 했다. 

막상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부리겠지만, 웬만하면 그런 만남의 가능성을 낮추고 싶었다. 엘리베이터가 혹시 14층에서 내려오고 있는 건 아닌지, 1층에서 14층의 그를 만나지는 않을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표시창을 한번 더 확인하였다.

나에겐 왜 1년 중 단 하루의 만랩과 364일을 가득 채우는 쪼랩 밖에 없는지, 중간은 어디다 빼먹은 채로 태어났는지 스스로를 책망했지만 이렇게 생겨먹은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던가. 그저 벌인 일감당할  밖에 없다. 

감당해야 할 그 순간에 1년에 한 번만 온다는 가공할 초능력이 와준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핫바지 얼굴마담 바지사장 같은 신이 또 심심해진다면 그것마저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겠지... 쩝쩝 입맛만 다시며 닫힘 버튼을 재빨리 눌렀다.


이전 04화 무미건조한 만남으로 스쳐지나고 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