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은 시간이 평소의 2배였던 탓에 허리도 아팠고, 아이들이 깼을지도 모를 시간이라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자두와 복숭아 향이 맴도는 통에 마트를 나서던 발길을 다시 돌렸다. 지금 이 한 철에만 맛볼 수 있는 저 과일을 지나치는 것은 도리가 아닐듯하다. 한창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햇빛을 어찌 마셨기에 이리도 고운 빨강이 번졌을까. 주섬주섬 천도복숭아만 바구니에 담았는데 고새 욕심이 났는지 우유보다 무게가 더 나가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복숭아를 씻어 내었다. 제철 과일은 조각조각 접시에 썰어 담아 포크로 찍어 먹는 것보다는 통째 들고 한 입 가득 와앙~ 베어 무는 것이 어울린다. 뭔가 꾸미지 않고 그 자체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만나는 맛이랄까..
한가득 과육이 들어오면서 입안에서 향도 터지고 맛도 터진다. 초여름을 만끽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방법 아니겠는가~
그런데겉 과육을 베어 먹고 나니 고난이 찾아왔다. 씨앗 둘레에 붙은 과육이 신맛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왜 날 먹었냐 심통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씨앗만은 살려달라 방어하는 것도 같다. 이번 천도복숭아는 유난히 더 시어서 먹던 부분을 온전히 도려내고 남은 3/4을 랩으로 싸버렸다.
저걸 어쩌나 묘수를 생각하는데 마침 남편이 복숭아 조림을 생각해낸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어여쁜 연예인이 자태만큼이나 어여쁘게 만들어내던 것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렇지- 나도 인상적이었어.
와인을 콸콸 부어 만들어내던 것..
그 술이... 콸콸콸.....
검색을 해보니 화이트 와인 외 청주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청주가 복숭아를 아삭하게 하고 방부 역할을 한다는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아... 청주라는 단어를 영접하고 나니 갑자기 화이트 와인보다는 청주가 더 끌린다. 아픈 허리 생각할 겨를도 없이 냅다 내달린 마트에서 제주용 청주를 찾아냈다. 손안에 들어가는 깜찍한 미니 사이즈도 있었으나 굳이 700ml를 샀다. 난생처음 만들어보려는 복숭아 조림이라 시험 삼아 딸랑 3개만 해볼 건데 청주는 복숭아 30개 넣을 양으로 준비하는 셈이다.
너 조림용으로 덜고 나면 내 거 하자!
이런 감정, 몇십 년 만이더냐..
두근두근 격렬한 고백을 읊조리고 있는데 마트 계산원 아줌마는 "오늘 제사 지내시나 보네~"라며 나를 안쓰럽게 바라봐 주었다.
레시피는 매우 간단했다.
1. 복숭아 3개를 조각낸다. (껍질이 들어가면 향이 더 좋고 색깔도 곱다고 하여 나는 껍질을 그대로 넣었다.)
2. 물 한 컵이 끓으면 설탕을 한 컵 넣는다. 이때 젖지 않는다.(물:설탕:청주= 1:1:1)
3. 설탕 넣은 물이 끓어오르면 깎아놓은 복숭아와 청주 한 컵을 넣고 중불로 줄여 졸인다. (물:설탕:청주= 1:1:1)
4. 복숭아가 투명해지면 불을 끈다.
물질을 넣고 가열만 하면 되는 단순한 과정인지라 만성 똥손이 완벽히 커버되는 맛이 완성된다.
남편은 황도 통조림이 집에서 된다며 신기해했고, 우유에 섞어 복숭아 라테를 만들어 마신 아이들은 홈 카페 트렌드에 입성한 것에 감격했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을 모두 재운 뒤 남은 청주를 음미할 내 모습을 떠올리니 이불 킥하며 데굴데굴 구르고 싶도록 행복해졌다.
길이길이 이 계절과 과일을 축복해야겠다 다짐하며 오랜만에 청주 잔을 꺼내 말갛게 씻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