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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런 Sep 08. 2020

몰랐던 것도 아닌데 꾸준하게 실수한다

불혹과 미혹 사이에서 삐끗하는 중년의 자아비판

코로나로 정상 개학을 못하다 보니 아이들의 2학기 교과서를 부모가 직접 수령하게 되었다. 두 아이의 방문일이 26일과 31일로 각기 달라 한번에 받는 걸로 신청할까도 싶었지만 최근 들어 지끈지끈해지는 어깨로 두 개의 책꾸러미를 한꺼번에 들고 오기가 염려스러워  종전대로 각 학년별 배정시간에 가기로 했다.


8월 26일 오후 2시 20분.  현재 기온 33도, 체감기온 36도- 습기까지 바짝 올라 불쾌한 데다 녹아 흘러내린데도 이해될 법한 기온임에도 선생님들은 정돈된 자세와 친절한 눈 맞춤을 잊지 않으며 교과서를 나눠주고 계셨다. 말문이 턱턱 막힐 법도 한데 작은 아이의 담임선생님은(이하 A 선생님) 근황을 묻고 공지사항을 또 한 번 설명하셨다.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 특유의 또박또박하면서도 음률이 통통 튀는 목소리임에도 마스크란 장애물을 통과하다 보니 금세 우둔해진다. 잘 못 들었다며 예? 하고 반문하는 나를 위해 선생님은 흔들리는 동공을 바로 잡고 데시벨을 더 높였다. '목청이라도 아끼시게 얼른 사라져 드려야지' 맘먹고 있는데 '오신 김에 큰아이 교과서도 같이 가지고 가시라'며 다른 학년 명부를 찾으시는 것이다.


-신청을 안 했는데 지금 가능한 건가요?

-네, 지금 해당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가지고 가실 수 있게 해 드릴게요.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갑자기 요청해도 문제가 없다는 건가? 이미 다 준비가 된 건가? 31일 큰 아이의 담임선생님(이하 B선생님)이 더위 속에서 목을 혹사하실 텐데, 나라도 지금 수령해서 약간의 수고라도 덜어드리는 것이 나은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이미 다른 선생님께서 교무실에 전화를 넣는 상황이 펼쳐졌다.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어깨가 아프고 어쩌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에 가져가 주는 편이 A 선생님의 수고에 응답하고 B선생님의 고생을 덜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허나 통화 연결은 불발되었고 다들 바쁜 듯 보여 조금 더 기다려보라는 선생님의 배려를 사양하고 돌아섰다. 잠깐 동안의 해프닝이었으므로 별다른 되새김 없이 바로 잊어버렸다.



오늘 오신다는 회신이 없어서 담주 월요일에 오시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미리 연락 주셨으며 준비를 해뒀을 텐데요..ㅠ.ㅠ



집에 돌아  B선생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교과서 외에도 첨부할 자료와 재료들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월요일에 수령해야 한다는 얘기를 덧붙이셨다. 나는 그제야 나도, A 선생님도 B선생님의 사정에 대해선 전혀 몰랐음을, B선생님을 해프닝 속 당사자로 소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A 선생님은 두 번 걸음 해야 하는 나를 위한 배려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배려에 응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에 휩싸여 B선생님의 수고를 덜어드린다는 명분을 만든 뒤 나와 A 선생님 간의 배려 릴레이를 완결 지어버렸다. B선생님의 입장은 그 안에 없었던 것이다.  

설사 책꾸러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약속을 어긴 돌발적 요청은 '내가 왔으니 즉시 대령하라'는식의 매너 없는 요구가 아니었나 싶어 뒤늦게 마음이 덜컹해졌다. 즉시 B선생님께 사과를 드리고 본래의 일정대로 수령할 것을 말씀드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이런 상황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례로 나와 차로 5분 거리에 사는 동료가 있었는데 어쩌다 퇴근시간이 맞아 그의 차를 타고 퇴근한 일이 있었다. 각자의 업무가 바빠 옆자리임에도 사적으로 아는 것은 많지 않았는데 차 안에서는 평소 몰랐던 속내를 나누었던 탓에 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동료도 그 시간이 좋았던지 하루는 나보다 먼저 일이 끝났음에도 몇 분 더 기다려 같이 가겠다고 옆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은 나 혼자만의 시간이 갈급했다. 업무적 문제로 골치가 아프기도 했고, 당시 친정부모님을 집으로 모셔 아이를 맡긴 워킹맘이었던 만큼 알게 모르게 내부에서 곪고 있는 이면의 갈등이 있었던 데다, 아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걱정스러운 전화도 한 통 받고 나니 울적하여 나 홀로 조용히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그래서 완곡한 거절을 하며 기다리지 말고 얼른 퇴근할 것을 종용했고 동료는 농반진반으로 내가 싫어서 그러느냐, 같이 안 가면 삐치겠노라 옥신각신하였다. 그때 등 뒤의 다른 동료가 날 거들어 줄 요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런 씨, 같이 가줘라~ 이왕 가는 길에 내리는 거 민폐 아냐. 뭘 그리 미안해하고 그래~

나를 비롯한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서로를 아우른다고 생각했겠지만 서로를 소외시키면서 말이다. 마침 기분도 좋지 않았던 탓에 - 그들의 선의와는 별개로 - 절벽 사이에 둘러싸인 느낌이 들어 넌더리가 났다. 나를 이해시키고자 설명하고픈 에너지도 사라지고, 그저 이 속에서 그들이 삭제되거나 내가 증발되는 2가지 선택지 중 어느 하나라도 지금 당장 실현되길 간절히 바라는 것만이 유일한 의지였다.




그렇게 싫던 상황을 이제 와서 내가 전개시키다니, 나는 어디에서 브레이크가 풀린 걸까...


가장 강력하고도 만만한 범인은 좋은 사람 콤플렉스. 좋은 사람, 유익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A 선생님의 적극적인 배려를 거절 못한 미련함,  어깨가 아픈 걸 불사하는 것이니 고마워할 일이란 착각과 안일함, 모두 딱딱 들어맞는다. 좋게 말하자면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종일 것이다. 다만 내가 어리석다 보니 약속까지 어겨가며 좋은 이미지를 고수하려는 반칙을 쓴 탓에 기어코 긁어 부스럼을 낸다. 내 신의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상대의 상황을 짐작해서 베풀려는 오버가 비극을 낳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기만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로는 역시나 사람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적다는 것, 궁극적 관심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

나도 A 선생님도, 과거의 나와 내 동료들도 미세한 입장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자기 시선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름대로 타인을 배려하려 한 것이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 되고픈 자기 욕심을 위해 타인을 이용한 것이 아닐까? 최종의 관심사는 타인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안이나 만족감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배려를 위한 사전 판단이 틀렸음을 탓할 생각은 없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를 논하기 전에, 하루 12번도 더 변하는 내 마음조차 나도 잘 모르겠는데 타인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건 난센스 아니겠는가-  그리고 선한 영향력을 한 의도에는 기본적으로 격려해 주고 싶다.




이쯤에서 가장 심각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 부상한다. 이런 점들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여전히, 꾸준하게 실수한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과오와 영영 이별하는 줄 알았는데 주기가 조금 길어진 만큼 횟수가 줄어간다는 것뿐이지 안 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날 보면 말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런 모습조차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이라 하니 남부끄러워 요동치는 몸부림 진정시키고 다시 한번 당. 연. 한 진. 리들을 자체 교육시켜야겠다. 

잘 보이려고 노력 말고, 없는 이미지 애써 꾸미려 말고, 내 입으로 말한 건 있는 그대로 지킬 것.  특히 나의 행위가 나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누구 하나라도 소외시키는가? 아닌가? 는 진중하게 따져볼 일이다.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눈치 없다 소리 들을지라도 추측하지 말고 직접 물어볼 것-


오늘 이렇게 되새김질하고 나면 뻘짓의 주기는 또 얼마나 늘려놓을 수 있을까? n번째 뻘짓이 돌아오기 전까지 나잇값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다져놓을 수 있을까?

현명한 처세술을 능수능란하게 부리는 도인이 되면 좋겠다. 그러면 스스로를 다그치지도, 깎아먹지도 않으면서 유유히 번뇌 사이를 헤쳐 지나갈 텐데..

내 속도 모르고 뭉게구름 유유히 흘러간다.

그래, 가라.. 여전히 삐끗하는 내 한심한 잔상을 모조리 품고 가서 저 멀리 태평양 어디쯤에서 거센 비로 뿌려 날려버리렴. 새로 태어난 듯이 처세술을 곱씹고 있을 테니...

불혹과 미혹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자의 변명이 오늘도 죽삐죽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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