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큼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쓴맛으로 시작했던 술잔이 매끄럽게 넘어가고 흥도 올라 한창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럴 때면 술병에 가뭄 증상이 나타난다. 조금만 기울여도 채워지던 유량이 미미해지더니 어느새 방울방울 다 떨어지고 말았다. 딱 두어 잔만 더 채우면 흥도 접고 미소를 띠며 누울 수 있을 텐데 약 올리듯 꼭 이럴 때 술이 떨어진다.
잘 됐다. 성난 들소 마냥 인근 동산을 휘젓고 난 후 식료품 구입을 위한 일 외에는 나가지 않았다.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어 몇 날 며칠을 틀어박혀만 있었는데 마침 술도 떨어졌다니 아주 잘됐다. 12시를 진즉에 넘긴 밤, 아파트만 무성한 동네에 사람들이 얼마나 돌아다니겠나- 편의점에 가서 딱 맥주 몇 캔만 사 오자. 흥얼흥얼 슬리퍼를 찾아 신었다.
편의점은 곳곳에 널려 있다. 아파트 상가라면 모름지기 부동산과 학원, 편의점은 갖추어야 한다는 듯이 모든 단지가 이 공식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도보 2분 거리에 택할 수 있는 편의점만 3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 나온 김에 조금 더 걸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이 일대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중심상가 쪽 편의점으로 향했다. 도보 2분 거리를 이 갈래 저 갈래 둘러둘러 도보 20분으로 만들 수도 있었으나 이미 컴컴해져 용기내기 쉽지 않은 길들이 많으므로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인도하는 보다 안전한 곳이 나을 것 같았다.
보름달 같은 원형 가로등이 일렬로 빛을 내는 호젓한 정원을 걷자니 취기와 어우러져 마음이 들떴다. 아파트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남녀가 눈에 띄자 마치 내가 월하노인이라도 된 듯 맘속으로 그들의 미래를 축복하였다. 가까이 지나칠 때 듣고 보니 여자 쪽 말투가 뾰족했고 남자가 용서를 비는 형색이기에 잠시 뻘쭘하였으나 '그러면서 정드는 거지 껄껄껄' 혼자 합리화하며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상가 초입은 이미 낮의 기운이 말끔히 증발되는 중이었다. 아파트 주변이다 보니 상가의 종목들이 얌전(?) 한지라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그 와중에도 배달 오토바이가 여러 대 지나가곤 했다. 야식 배달인지심부름 대행인지 모를 일이나 심야에도 사람들에겐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구나 싶었다. 오토바이 중에는 넘치는 개성을 주체 못 해 번쩍번쩍 형광빛을 내거나 모터 소리가 큰 경우도 있었다. 정적인 밤길을 기대하며 나온 나에게는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주점이 몇 군데 몰려있는 곳을 지날 쯤에는 오르던 취기가 확 가셨다. 삼삼오오 몰려서 담배를 피우는 무리나 이미 술에 취해 말과 행동이 과장된 시커먼 사내들을 보니 사바나 한가운데 서있는 초식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명확한 신호를 읽을 수 없지만 일단 내가 이방인이자 약자임이 강하게 느껴지는 거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슬리퍼를 끄는 웬 오징어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도 방어 및 공격 태세를 갖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남녀의 소음에 껄껄껄 하던 그 호기로움은 어디 가고 꽁무니 빼듯 총총총 걸음을 옮겼다.'이 찌든 속세를 떠나야 번뇌를 벗어버리지' 거듭 중얼거리며 역한 담배냄새와 크~윽하고 가래침 뱉는 소음 사이를 바퀴벌레처럼 도망쳐 나왔다.
무사히 맥주를 거머쥐고 상가를 빠져나왔지만 모처럼의 야간 산책을 위축감과 불쾌감으로 끝내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거의 없고 불은 켜진 곳- 아파트 사이 길들- 을 통과하여 가기로 했다.
한 캔을 왼손에 들고 홀짝이며 천천히 걸었다.
눅진한 밤공기가 모든 소음을 적셔 내린 듯 사방이 고요했고 그 속에서 오직 풀벌레들만 소록소록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불 켜진 집들이 위성처럼 머리 위를 맴돌고, 발아래로는 나뭇잎 그림자들이 산들바람에 나부껴 길 전체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간혹 개를 산책시키거나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이 지나쳤다. 그들도 사람이 없을 시간을 찾던 나와 비슷한 의도였을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이 상황이 서글펐다.
그렇게 한참을 쭉 걸어 나간 끝에는 피어나는 아침의 역동을 선사하던 숲이 어둑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행여나 숲의 곤한 잠을 방해하는 소음이 될까 봐 흥얼거리던 콧노래와 마찰음이 섞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남녀의 다툼에, 오토바이 소리에, 취객의 소란에 불쾌했던 마음을 숲에게 돌려줄 순 없는 일. 밝아올 시간을 위한 거룩한 휴식에 경의를 표하며 '쉬십시오, 곧 뵙겠습니다.' 속으로 되뇌었다.
나 또한 곧장 집으로 돌아와 어둑하게 드러누웠다.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다시 신록을 마주할 수 있게 되길 염원하며 까무룩 꿈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