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런 Aug 27. 2020

밤이 깊었네

야간 산책

달큼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쓴맛으로 시작했던 술잔이 매끄럽게 넘어가고 흥도 올라 한창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럴 때면 술병에 가뭄 증상이 나타난다. 조금만 기울여도 채워지던 유량이 미미해지더니 어느새 방울방울 떨어지고 말았다. 딱 두어 잔만 더 채우면 흥도 접고 미소를 띠며 누울 수 있을 텐데 약 올리듯 꼭 이럴 때 술이 떨어진다.


잘 됐다. 성난 들소 마냥 인근 동산을 휘젓고 난   식료품 구입을 위한 일 외에는 나가지 않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어 몇 날 며칠을 틀어박혀만 있었는데 마침 술도 떨어졌다니 아주 잘됐다. 12시를 진즉에 넘긴 밤, 아파트만 무성한 동네에 사람들이 얼마나 돌아다니겠나- 편의점에 가서 딱 맥주 몇 캔만 사 오자. 흥얼흥얼 슬리퍼를 찾아 신었다.




편의점은 곳곳에 널려 있다. 아파트 상가라면 모름지기 부동산과 학원, 편의점은 갖추어야 한다는 듯이 모든 단지가 이 공식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도보 2분 거리에 택할 수 있는 편의점만 3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 나온 김에 조금 더 걸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이 일대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중심상가 쪽 편의점으로 향했다. 도보 2분 거리를 이 갈래 저 갈래 둘러둘러 도보 20분으로 만들 수도 있었으나 이미 컴컴해져 용기내기 쉽지 않은 길들이 많으므로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인도하는 보다 안전한 곳이 나을 것 같았다.


보름달 같은 원형 가로등이 일렬로 빛을 내는 호젓한 정원을 걷자니 취기와 어우러져 마음이 들떴다. 아파트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남녀가 눈에 띄자 마치 내가 월하노인이라도 된 듯 속으로 그들의 미래를 축복하였다. 가까이 지나칠 때 듣고 보니 여자 쪽 말투가 뾰족했고 남자가 용서를 비는 형색이기에 잠시 뻘쭘하였으나 '그러면서 정드는 거지 껄껄껄' 혼자 합리화하며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상가 초입은 이미 낮의 기운이 말끔히 증발되는 중이었다. 아파트 주변이다 보니 상가의 종목들이 얌전(?) 한지라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다. 그 와중에도 배달 오토바이가 여러 대 지나가곤 했다. 야식 배달인지 심부름 대행인지 모를 일이나 심야에도 사람들에겐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구나 싶었다. 오토바이 중에는 넘치는 개성을 주체 못 해 번쩍번쩍 형광빛을 내거나 모터 소리가 큰 경우도 있었다. 정적인 밤길을 기대하며 나온 나에게는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주점이 몇 군데 몰려있는 곳을 지날 쯤에는 오르던 취기가 확 가셨다. 삼삼오오 몰려서 담배를 피우는 무리나 이미 술 취해 말과 행동이 과장된 시커먼 사내들을 보니 사바나 한가운데 서있는 초식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명확한 신호읽을 수 없지만 일단 내가 이방인이자 약자임이 강하게 느껴지는 거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슬리퍼를 끄는 웬 오징어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도 방어 및 공격 태세를 갖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남녀의 소음에 껄껄껄 하던 그 호기로움은 어디 가고 꽁무니 빼듯 총총총 음을 옮겼다. '이 찌든 속세를 떠나야 번뇌를 벗어버리지' 거듭 중얼거리며 역한 담배냄새와 크~윽하고 가래침 뱉는 소음 사이를 바퀴벌레처럼 도망쳐 나왔다.




무사히 맥주를 거머쥐고 상가를 빠져나왔지만 모처럼의 야간 산책을 위축감과 불쾌감으로 끝내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거의 없고 불은 켜진 곳- 아파트 사이 길들- 을 통과하여 가기로 했다.


한 캔을 왼손에 들고 홀짝이며 천천히 걸었다.

눅진한 밤공기가 모든 소음을 적셔 내린 듯 사방이 고요했고 그 속에서 오직 풀벌레들만 소록소록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불 켜진 집들이 위성처럼 머리 위를 맴돌고, 발아래로는 나뭇잎 그림자들이 산들바람에 나부껴 길 전체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간혹 개를 산책시키거나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이 지나쳤다. 그들도 사람이 없을 시간을 찾던 나와 비슷한 의도였을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이 상황이 서글펐다.


그렇게 한참을 쭉 걸어 나간 끝에는 피어나는 아침의 역동을 선사하던 숲이 어둑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행여나 숲의 곤한 잠을 방해하는 소음이 될까 봐 흥얼거리던 콧노래와 마찰음이 섞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남녀의 다툼에, 오토바이 소리에, 취객의 란에 불쾌했던 마음을 숲에 돌려줄 순 없는 일. 밝아올 시간을 위한 거룩한 휴식에 경의를 표하며 '쉬십시오, 곧 뵙겠습니다.' 속으로 되뇌었다.  

나 또한 곧장 집으로 돌아와 어둑하게 드러누웠다.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다시 신록을 마주할 수 있게 되길 염원하며 까무룩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전 13화 할 수 있는 만큼만 묵묵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