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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런 Aug 20. 2020

궤도이탈

나의 궤도를 다시 만들기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던 시간이 지났으나 여전히 흐리기만 하다. 언제 다시 내리기 시작할지 모르니 멀리 나갈 도리가 없어 아파트 안을 몇 바퀴 걷기로 했다. 7시가 안 된 시간이라 새소리를 제외하고는 사방이 고요하고 자박자박 내 걸음만이 숨죽여 기척을 내고 있었다.

놀이터 주변을 돌아 나와 정자가 있는 정원에 들어섰더니 두어 마리의 까치들이 다투는 중인지 깍깍깍깍 격한 고성을 뱉어냈다.


"어허~"


멀리서 갑자기 엄한 소리가 났다. 까치들을 꾸짖는듯하다. 그럼에도 까치 소리가 여전하자 어허 거참~ 점잖게 또 꾸짖는다.

고개를 돌려보니 모래폭풍과도 같은 아우라를 뿜으며 달려오는 이가 내 꽁무니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명 걷고 있는데 순식간에 원근감이 사라졌다.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걷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절박감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을 냈다. 나름 더 빨리 치고 나가기로 하고 열심히 발길질하듯 걸음을 다그쳐봤지만 좁은 오솔길에 이르러선 또다시 내가 그 사람의 앞 길을 막고 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멈춰 길을 내주었더니 고마워요~ 하며 쌩하니 걸어간다. 스스로를 발사시키는 놀라운 에너지에 묵언의 찬사를 보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여 다시는 만날 일이 없도록 경보 모드를 작동했으나 그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빨랐다. 궤도 내에서 이내 재회하였고 나는 엉거주춤 또다시 길을 비켜 주었다. 내가 자전하는 지구라면, 그는 공전하는 달과 같았다.


3번째 만남에서는 거수경례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몇 바퀴를 더 돈 상대의 숨소리는 자연풍인데 내 숨소리는 히말라야 중턱에서 날 법한 템포다. 그런 주제에 이웃사촌의 앞길을 막는 민폐를 자행하고 있디는 사실에 뒤통수가 시렸다. 저 창대한 파워워킹을 위해 꺼져줘야 도리가 아닐까.. 양심의 소리가 들끓는 와중에 그는 또 한 바퀴를 돌아 내 곁을 지나간다. 산삼 깍두기라도 먹는 건가?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가 계속 레이스를 평정하니  나는 점점 못 올 곳을 온 기분이 들었다. 속도 경쟁 따위는 애초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뭔가가 자꾸 불편해진다. 내가 계속 앞을 막는듯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도, 굳이 좁은 길에서 비켜 지나가야 하는 상황을 감수하며 빠르게 걷기에 심취한 저 치의 저의를 궁리하게 되는 것도 불편해졌다. 그가 우등생, 내가 열등생 같다는 지위 해석도 조금씩 싹이 튼다. 지금까지 목격한 교육에 의하면 반 평균 까먹는 애들은 존재 자체가 죄인이었으므로 입도 뻥끗 말고 우등생들의 입신양명 컨디션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삭제됨이 마땅했다. 규정 상 교실 밖을 나갈 순 없으니 차라리 잠을 자거나 낙서를 하면서 암묵적 명령에 복종하며 무기력한 냄새를 풍기곤 했다. 나를 열등생으로 만들 순 없지. 곁을 지나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에 작별을 고하고 나의 레이스를 찾아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달리지도 않고 거친 엔진 소리도 내지 않는 차들이 조용히 나를 반겨주었다. 나를 뒤쫓듯 운동하는 이가 없어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 사람이 날 추월하든 말든, 그냥 내 속도대로 걸어 다녔으면 도리어 그 사람이 날 피했으려나 살짝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여러 번 앞을 가로막히니 귀찮았을 텐데 짜증 섞인 기류 한번 보내지 않았던 걸 보면 상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괜히 내가 지레짐작으로 스스로를 짐짝으로 취급해버린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찌 됐든 난 당신 때문에 불편했어. 지만 비가 와서 당신도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오면 난 불편하게 만들진 않겠어. 열등하지만 맘 넓은 내가 그 정도는 베풀 순 있지~ 혼자 거들먹거리며 잡상을 거둬들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보폭을 크게 벌리고, 발뒤꿈치부터 내디뎠다.

방지턱에 걸려 자꾸 넘어지려는 자신에게 어허~ 어허 거참~ 나지막이 꾸짖으며 중년의 허술한 걸음마를 계속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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