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런 Sep 03. 2020

태생적 미니멀리스트의 방황기

존중의 미니멀을 위하여

태생적 미니멀리스트


나는 태생적으로 미니멀리스트다. 동년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갖추지 않고 사는 것에 익숙하다. 출퇴근할 때도 핸드백 없이 폰만 주머니에 넣은 채 다녔다. 지금은 발이 편한 슬립온 하나와 여름 샌들로 한 해를 나는 중이다.  옹색해 보일지라도 치렁치렁 달고 갖추는 것이 영 귀찮고 불편하기에 어쩔 수 없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어린 시절부터 소비 지향라이프 스타일에 노출되어 있었다면 지금과 다를지도 르겠지만 그런 일은 발생된 적이 없다.


부모님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난을 다니던 7살, 3살 어린이였다. 전후의 궁핍과 결핍의 소산 덕에 뭐든 함부로 버리는 법이 없었다. 양말에 구멍이 나면 바느질해 주셨고, 걸레를 빤 물조차 변기 물로 재활용하셨다. 몽당연필에는 볼펜깍이를, 연습장 용도로 이면지를 묶어주셨다. 공무원 박봉으로도 집 한 칸 마련하고, 아이들 대학에, 시집 장가까지 다 보낼 수 있었던 데는 아끼고 덜 쓰는 전 생애에 걸친 노고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를 보고자란 탓인지 목욕물로 변기 청소를 하지 않고 그냥 버리기라도 하면 묘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때는 사춘기였으므로 '난 이렇게 안 살 테야'를 외치며 이 집을 빠져나가면 구린내를 벗어버릴 거라 주장했고,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자취생활이 시작되자 나는 더 구려졌다.

엄마 없는 삶은 불행의 늪이었다. 청소하고, 세탁하고, 밥해먹으면 생필품과 음식재료 같은 소모품을 또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채워 넣으면 또 청소하고, 세탁하고, 밥해먹어야 하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 내가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띠에서 탈출하면 이 지긋지긋한 그림자 노동도 없어지겠지? 나는 최대한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기로 마음먹고 모든 자원과 가사활동을 최소화했다. 게다가 이사하더라도 도보 5분 이내의 대학가 하숙촌 안이었으므로 짐이 없어야 내 몸이 덜 고생했다. 비디오나 책을 갖춰놓는 최소한의 문화적 여유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기본적인 것들만 가졌고 그만큼 미니멀해졌다. 

당시 근처 골목에 춘자라는 시고르자브종이 살고 있었는데 그 개는 담요가 깔린 네모난 판잣집에서 잠만 자는 주제에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수라상을 받아먹곤 했다. 다정했던 내 친구 춘자네 집에 비디오랑 책가방만 넣어두면 나와 내 방의 그림이 완성되는 거 같다고 소곤소곤 말해주었다.


 

영화일을 하겠다고 한창 덤벼들었을 때는 난생처음 가난이란 것을 실감하다. 개봉시킨 영화가 망해서 월급이 절반으로 삭감되기도 했고, 어제까지 으쌰 으쌰 하자던 실장 놈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 프로젝트는 무산되고 임금 체불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졌던 것을 중고로 팔아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으므로 미니멀의 끝판을 달성했다. 방 안에는 최소한의 옷가지 걸린 간이 옷걸이와 이불, 베개, TV와 비디오, 소형 냉장고만 남았고 우편함에는 2000원대의 전기(기본) 요금이 찍힌 납부 명세서가 꽂혔다.


가난이 주는 처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병원비가 무서워 아파도 병원을 마다하게 하고, 드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무언가를 시작해 볼 용기를 주저시킨다. 특히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몸도, 마음도, 꿈도... 눈물이 나니 궁핍썰은 여기까지 하겠다. 

그런데 가난의 저주와는 별개로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살아지는 이면이 발견된다. 정말 그러고도 살아진다. 화장은 안 하면 그만이었고, 책과 인터넷은 도서관에서 해결됐고, 좋아하는 청바지와 티셔츠 몇 벌로도 살긴 살아졌다. 그렇게 살다 보면 가진 것을 손질하고 관리하느라 드는 시간과 에너지가 대폭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크 블라우스를 한번 입겠다고 김치 국물이라도 튈까 조심하는 태도나 세탁소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없앨 수 있단 말이다. 이 무슨 웃픈 깨달음이냐 하겠지만 사람의 적응력은 꽤 놀라운 것이어서 어떻게든 방법을 만든다. 나는 가난에 적응하는 것은 거부했지만, 미니멀한 삶이 주는 이점은 잊지 않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복병의 등극


불행히도 좋아하는 일은 안 하게 되었다. 몇 번 뒤통수를 맞고 나니 정나미가 떨어져 못하게도 됐지만, 안 하게도 되었다. 대신 결혼, 출산으로 인한 육아 의무를 짊어지면서 종전과는 다른 규모의 살림을 책임지게 되었다. 살던 가락이 있으니 당연히 미니멀하게 살 수 있었다. 물건을 사기 전 반드시 필요한지, 활용을 잘할지에 따라 구매를 하고, 최선의 선택을 위해 기능과 가격의 합리성까지 따지는 선별과정을 거친다. 갖고 싶다는 욕망은 선택지가 아니기에 잉여 소비는 극히 낮다. 이 진 빠지는 과정 덕에 물건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복병은 아이였다. 육아용품은 경험치가 없어 활용도 여부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내 물건은 안 사도 아이 물건을 보면 지갑이 열리는 마술 피하지 못했다. 남들에 비하면 자제심이 강했지만 이전까지의 미니멀에 비하면 관대함이 보살급으로 상되었다.

물려받은 전집과 나의 심사를 통과한 단행본들로만 엄선했음에도 책장 3개를 채우게 되었다.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하면 엄마표 유기농으로 먹이고 싶어 아이스크림 제조기를 들여놓거나 말 타는 시늉을 하면 스프링 말을 들였다. 아이의 관심에 따라 다른 교구와 장난감도 채워져 갔다. 물건들로 채워지는 공간이 답답했지만 이것도 아이가 어린 한 때일 것으로 여기고 견뎠다. 하지만 터울이 긴 둘째가 생기니 10년 정도 예상했던 찰나는 더 연장되었고 그즈음 남편이 물질에 박차를 가하는 통에 어항이 어항을 낳고 있었다. 집 안을 볼 때마다 아비규환을 연상했지만 날 제외한 가족 모두 행복한 집돌이의 미소를 띄고 있었다.


다행인 건 아이들이 커가니 큼직한 유아용품들이 빠지고 과학상자나 레고 같은 작은 물건들이 들어왔다. 소형화되는 회전율 덕에 그나마 방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집에 머무르면서는 불필요한 물건들을 버리거나 이웃과 나누는 소위 '비움'이란 행위 시도했고 효과는 더 커졌다. 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발로 장난감 밀어내어 길을 만들던 때가 있었는데 이대로 추억이 되는 건가? 으흐흐' 했을 때 남편은 차분하게 응답했다. '그래도 여전히 지저분하잖아..'


처음엔 지저분한 것이 아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집안 전체를 요새로 구축고, 글루건으로 뭔가를 계속 만들어내면서 잘린 박스나 젓가락 조각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집트 노예 놀이*를 살풀이하듯 한 번씩 하고 나면 불도저로 민 듯 깨끗해지긴 하는데 여전히 뭔가 너절하다는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이 집이 지저분하다는 건 아이들의 물건 때문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이집트 노예 놀이란 벽돌(치울 것들)을 끼워 넣어(정리) 파라오의 피라미드완성한다는 시놉으로 진행되는 우리 집 남아들의 청소 놀이다.)



물건이 가야 할 곳



2% 부족한 것이 뭔지 몰라 정리정돈에 관한 책을 죄다 빌려 보았다.  곤도 마리에를 비롯한 다수의 일본 작가들의 책과 만화들, 2~3년 전부터 쏟아지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책까지 훑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니트를 세모 모양이 나도록 옷걸이에 갠다거나, 색상별로 옷걸이에 진열하고 지퍼백에 얼려 세워서 냉동실을 정리한다는 식 말이다. 이건 나도 이미 안다고!(안다고 했지 다 따라 했다고는 안 했다)할 즈음 무릎을 탁 친 된 문장이 있었다.


‘정리=버리기’가 아니다.
진짜 정리는
물건을 버리고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진열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가야 할 곳을 정해주는 것이다.  

-정희숙,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 중에서-


이 문장을 읽은 그날 저녁, 마침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저 문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 집콕 모드 덕에 정리정돈이 또 하나의 방송가 아이템이 된 모양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의뢰인의 집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확인시킨 후 정리 플렉스 해주고 후반 20분 정도는 계속 우와우와~하면서 끝이 난다. 인상적인 점은 일반적 고정관념 상 거실에 있는 것이라 여겨지는 장식장과 낮은 수납장이 주인의 방으로 옮겨지면서 다른 물건을 담는데 거실은 훤해지고 주인 방은 맞춤가구를 들여놓은 듯 깔끔해지는 것이었다. 그걸 보고 나도 우와우와를 외쳤다.  '물건이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 고정관념을 깬 재배치와 재정리..그것이 우리 집의 문제이자 해법임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리해주는 예능 프로그램, 우리 집에도 주라주라 와주라


나는 딱 하나만 배치 보았다.

거실과 연결되어있는 어항 작업실은 집안 환기 시 온습도 변화를 적게 하고자 기다란 커튼이 달려있다 보니 벽으로 닫힌 듯 답답한 감이 있었다. 그곳의 커튼을 걷어버리고 한쪽 철제 책꽂이를 넣어 낮은 경계로 바꾸었다. 책꽂이가 원래 있던 곳은 집안에 들어서는 복도 정반대 편에 있어서 바로 시선이 가는 곳인데 책, 그림 종이를 아무렇게나 꽂아놓아 지저분했고 안방을 드나드는 것도 불편하게 했다. 그런데 이것만 시야에서 빼버렸는데 안방 출입이 편해진 것은 물론, 한결 넓고 깨끗해 보였다. 옮겨진 책꽂이에는 거실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는 아이들을 위해 교과서와 그날그날 읽는 책들을 꽂았더니 동선이 짧아져 매우 편했다.

 


탄력을 받아 다른 방도 비움과 재배치, 정리 3종 세트적용해보고 싶어 졌다. 남편에게 이집트 노예 놀이 시즌 2에 합류할 것을 권하며 어항들에게 시선을 두자 '이제는 절대 지저분하지 않아.. 그럴 것 같아.'라고 선을 그었다.

 


존중의 미니멀


지금은 나와 남편, 두 아이 4명의 각기 다른 인격체가 모여 있다 보니 4개의 영역을 최대한 조화롭게 섞어야 한다. 나는 주방의 큰 나무 식탁, 남편은 가족실, 아이들은 각각 동쪽 서쪽 방 이렇게 각자의 전진기지와도 같은 공간을 배정해두었음에도 꼭 거실에 모여 티격태격 작업들을 해댄다. 그렇다 보니 서로의 영역 일부를 양보하기도 하고 꼴 보기 싫은 것들을 참아낼 때도 있다. 그럴 땐 일시적인 이집트 노예 놀이가 아닌  궁극의 미니멀을 꿈꾸며 불도저로 밀어내는 상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폭거는 비민주적인 데다 가족 간의 예의도 아닐뿐더러 인격에 대한 존중을 포기하는 것 아니겠는가- 불편한 것이 있다면 상의해서 치우되 선을 넘진 말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순리대로 살다 보면 아이들도 떠날 테다. 그때 혹시 올지 모를  빈둥지증후군 대비책으로 대대적인 정리 플렉스 카드는 소중히 남겨두려 한다. 그 날이 오면 진짜 춘자네 집처럼 만들어두고 영화나 보며 곁에 있는 누군가가 내 입에 간식을 넣어주면 참 좋겠다. '춘자네 집' 말고 '저런의 집'으로 문패를 적어놓고 다정했던 내 친구에게 사진도 보내야겠다. 네 말을 잊지 않고 내 진정으로 미니멀을 이루어냈노라고 소곤소곤 속삭이면서 말이다.









이전 10화 남편의 취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