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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런 Aug 27. 2020

남편의 취미

공존을 위하여


그가 처음 어항을 하나 가져왔을 땐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관상어는 애완이나 반려의 의미를 덧입히는 것이 매우 어색한 존재였다. 쌍방형 소통이 가능한 개나 고양이가 아닌 유리 벽 안에 갇혀 사육당하는 생명이 주는 감흥이란 것이 과연 성립하는가에 대한 절대적인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료를 주고 물을 갈아주는 등의 지속적이고 일방적인 수고를 감수하기엔 한계가 있을 거란 확인이 강했기 때문이다.


허락을 구하는 그에게 당신 아들하고나 잘 놀아주라며 면박을 주면서도 '아, 여느 집에 있는 거 마냥 우리도 금붕어나 구피가 유영하는 작은 풍경을 가지게 되는구나.. 생물을 키우고 위하는 행위가 아이의 성정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지.' 하는 정도의 도구적 용도를 생각하여 반대는 하지 않았다.


이면에는 그의 의욕이 부럽기도 하고 응원하면서 대리 만족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당시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던 나는 육아로 점철될 근미래가 뻔히 짐작되어 겪지도 않은 인생 전체가 시큰둥해졌는데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하면 신날지, 진짜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은 뭔지 알 수 없어 답답하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어디 한 번 해봐라, 100일 안에 다 팽개칠 것이다에 내 100원을 걸지! 호기롭게 그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막다른 길밖에 없는 미로 속인 줄 알았던 그곳이 고속도로였을 줄이야.



그는 처음 시클리드 계열의 니그로를 들여왔다. 그러더니 시차를 두고 구피, 베타, 가재, 애플 스네일 등등도 데려왔다. 그러면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손을 벌벌 떨며 어항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수차례나 비워대는 환수작업을 착실하게 해댔는데, 쓰레기봉투 하나 버리는 것도 갖은 엄살을 피우는 평소의 모습을 기준으로 따졌을 때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생이 새우를 들여왔을 때는 유기농 시금치를 사 와서 직접 데쳐 얼려놓곤 했고 나는 이유식을 하는 둘째를 위한 것으로 알고 기뻐했다가 뒤통수를 맞기도 했다. 특히 웅크리고 앉아 핀셋으로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수초 모내기를 하는 아우라를 목격했을 때는 뭔가 내 힘으로 막기 힘든 대류를 실감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나의 오판을 인정하며 씁쓸히 100원을 포기하고 뒤돌아섰다. (my money!)


노터치의 완벽한 자유를 얻은 그는 환수의 노예를 벗어나겠다 선언하더니 어느 날부턴가 비쉬림프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대하, 새우장, 새우깡, 딱새우, 독도 새우 밖에 모르는 내 뇌구조로는 그것 역시 애완이나 반려의 의미를 덧입히는 것이 너무나 어색했다.

그의 취미를 사랑해보려 했으나 새우 특유의 동족 포식의 본능 앞에 번번이 멘탈이 무너졌기에 내가 감당할만한 종은 아니었던듯싶다. 마음이 가는 동물은 아니나 다양성 하나만큼은 신기했다. 색상과 무늬, 서식환경, 족보마저 다양했고 그 다양성만큼이나 집의 어항도 점점 불어났다.       



그 돈으로 다른 것을 샀다 한들 이것만큼의 기쁨이었겠나


불어나는 새우 아파트에 투입된 가정경제의 지류가 만만찮은 건 알고 있었다. 만취한 남편이 저도 모르게 투입금액을 발설했을 땐 손절 차원에서 에프킬라를 뿌려볼까 고심을 잠깐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그냥 넘어갔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 굳이 비극을 자초하고 싶지 않아 외면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돈으로 다른 것을 샀다 한들 대단한 것을 들였겠나 싶기도 하고 최소 그에게만큼은 이 정도의 기쁨을 안겨줄 다른 무언가는 없었으리란 자명한 사실에 중점을 두어서였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스스로에게 베풀 수 있는 궁극의 행복이란 하기 싫은 일 안 하고, 하고 싶은 일 하는 것일진대 내가 하라 마라 정해줄 권리가 없다는 자각도 한몫했다. 책임져야 할 것이 있어 싫어도 해야하는 비극을 매일 감내해내는 이에게 반절로나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까운 자로서의 의리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볼멘소리 대신 어항 덕에 청소 면적이 더 줄었고, 가습기를 돌리지 않아도 되며, 가끔은 물멍도 누려보는 이점에 대해 더욱 주목하려 노력한다.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항상 미심쩍어하며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자책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내고, 꾸준히 집중하여 수준을 높이고, 입지를 다져나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자극이 되기도 한다. 나도 나의 성을 만들어야지,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서서 걸어 나가는 나의 길을 만들어야지..다짐하게 된다.

지금의 행적이 알알이 모여  나의 영역과 그의 영역이 건실하게 공존하는 노후를 누리게 되면 이것만큼 성공적인 결혼생활이 있을까?

'좋은 게 좋은 거다'로 끝나는 것 말고 '좋은 건 더 좋게'로 굴려가다 보면 진짜로 원하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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