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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런 Aug 21. 2020

할 수 있는 만큼만 묵묵히

본질을 본다는 것


안경을 쓴지도 수 십 년째.  남의 시선이 중요했던 어린 시절에는 디자인이나 렌즈 색상에 신경 쓰기도 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다 부질없음을 깨닫고야 안경이 주는 불편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몸에 다른 사물이 덧대여진다는 것은 항상 이물감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점점 글을 읽어야 하는 때를 빼고는 쓰지 않게 되었다.


안 써도 견딜만한 것은 아니다.

난시인지라 교통 표지판이 흐릿해 보여 아쉬울 때도 많고 오래 생눈으로 방치하면 두통이 올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나의 난시 필터가 마음에 들 때가 더 많다. 생 날 것의 민낯을 선명하게 직시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고, 흐릿한 것들을 나 좋을 대로 해석하여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뿌연 것들은 실제보다 아름다울 때가 더 많다.


이러한 연유로 아침 걷기를 할 때는 안경은 쓰지 않고 나온다. 햇살, 구름, 안개, 나무, 꽃, 잡초, 돌, 오솔길, 연못, 도로, 전봇대, 전선, 가로등, 빌딩, 개미, 새, 고양이... 이 모든 것들은 까무룩 어둠 속에 숨어있다가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갈수록 움트는 아침 기운에 실려 피어나듯 서서히 정체를 드러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어젯밤 사라지기 전 그 자리에 소복이 눕는다. 이 모습이 난시 필터를 지나면 경계가 뭉게뭉게 사라지는 유화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경이롭다. 음영이 강한 햇살이 비치는 때면 보다 찬란하여, 미천한 우주먼지에게 과분한 선물이 보이는구나 감격스러울 때가 많다.

새벽부터 이어지는 아침이야말로 난시가 주는 장점이 정점에 이르는 때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가끔은 나 좋을 대로 해석하는 함정에 빠질 때도 있다. 저 멀리서부터 미동도 없는 검고 칙칙한 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할 때 말이다. 그 순간은 이성이 마비되는 듯도 하다. 다른 여지를 일체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것이 길짐승의 사체일 것이라 단정 짓고 공포 속으로 들어가니 말이다.


실제 그것이 사체였던 적은 없었다. 돌덩어리나 검정 비닐봉지, 낙엽 무더기를 오인한 것이 전부였다. 사체가 있었다 하더라도 내 눈에 띄기 힘들다는 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곳은 사람들이 지나는 길인지라 짐승이 함부로 죽을 수 없도록 개입이 바로 들어가는 곳이며, 동트기도 전에 말끔하게 정돈해놓는 미화원들의 노고가 빛나는 곳이므로 내가 나오기 전에 옮겨질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 없을 때 사달이 났다 하더라도 이미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흔적이 사라졌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진짜 사체라 한들 내게 해 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물리적인 죽음은 그저 정지된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유추를 할 줄 알면서도 막상 덩어리 앞에서는 얼어버리고 만다. 낙엽 무더기라는 확신이 들면서도 그 모양이 영 께름칙하여 괴로워한다. 걸음을 멈추거나,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버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가간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착시에 무너지는 나의 현재를 이렇게 확인하고야 만다.


이치를 깨닫고 체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구나.. 내가 짐작도 못 할 만큼의 심연 속에 있어 닿지 못할 가치 같아 막막하기도 하다. 얼마나 다듬어야 우매함을 벗어날 수 있을까. 백발이 성성해질 즈음이면 눈빛과 말 한마디, 단순한 태도 하나에서도 연륜이 느껴지는 아우라가 나오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생각에 잠식될 것 같아 자리에 멈추어 호흡을 정리해 본다. 오해한 존재들에게 미물(나)이 일으킨 파장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가다듬어질 수 있도록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다시 한 발자국 내디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바보짓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덜 하게 되겠거니 위로하며 두 발자국 내딛는다. 이렇게 전진하다 보면 요다 발톱의 때만큼 따라 해도 덜 어색해지겠거니 웃으며 세 발자국 내딛는다.

기약 없는 길이겠지만 이렇게 하나의 점을 채워 나가다 보면 이정표가 만들어지겠지?

오늘도 그저 할 수 있는 만큼만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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