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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런 Sep 10. 2020

Left vs Right?

왼손으로 숟가락질을 시작했던 나는 세상을 깨닫기 전부터 이미 마이너리티가 되어있었다. 왼손을 쓴다는 것은 잘못된 것, 바람직하지 못한 것,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제재받기 일쑤인 이단적인 습성이었다. 옳고 바른 것은 오직 오른손일 뿐. 그 틈에 왼손이 들어갈 수 있는 예외란 건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 오른손을 쓰는 이와 왼손을 쓰는 내가 팔이 부딪히기라도 하면 그건 양쪽이 모두 자세를 바꿔야 하는 것이 아 왼손잡이인 나의 죄였다. 쓰면 안 되는 손을 쓰는 탓에 타인(오른손잡이)에게 불편을 주기 때문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불편을 겪는 오른손잡이 아이와 자리를 바꾸어 기꺼이 당신께서 왼손잡이 내야기하는 불편을 감수하셨다. 위축된 딸을 위한 배려인 것은 분명하였으나 오른손을 사용하는 연습을 추가시키는 것을 잊진 않으셨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서는 이전과는 다른, 보다 적극적인 교정의 시도들이 들어왔고 나는 글씨는 오른손으로 쓸 줄 아는 왼손잡이로 무사히 개량되었다.  어린 내가 납득한 판단으로는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훌륭한 사람이면 옳고 바른 사람이어야 하니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을 써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씨만 오른손으로 썼을 뿐인데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오던 태클들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림도 왼손으로 그리고, 가위나 칼질도 왼손으로 다 하는 난 여전히 '옳지 않은' 행태를 간직한 왼손잡이인데 그런 것으론 매도당하지 않았다. 마음껏 자연스럽게 왼손을 쓸 수 있는 분야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주류사회가 중요하다고 인정하지 않는 분야라는 것에 낙담하였다. 내가 살아 숨 쉬듯 편안하게 왼손을 쓰면 쓸수록 마치 낙오자라도 될 것 같은, 불온해지는 것 같은, 관심 밖이어서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내 맘이 불편해졌다.


막상 학교에 가서는 생각보다 왼손의 쓰임새가 나쁘지 않았다.

코 밥이나 팔 것 같은 아이가 글짓기나 그림 그리기로 제법 상을 타 오니 삼손이 머리카락에서 영험한 힘을 얻었듯 왼손 잡이기에 숨은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취급되었다. 특히 반이 바뀐 학기 초, 서먹한 친구 앞에서 왼손으로 좌우 방향을 바꿔 글씨를 쓰는 기술을 시전해 보이면 관종의 욕구를 해소하는데 아주 그만이었다.

변화하는 시대상도 한몫했는데 8월 13일이 세계 왼손잡이의 날로 지정되었다는 뉴스와 외국에는 왼손잡이용 물건들이 따로 있다는 영어 지문들이 문제로 나오기도 했다. 몇 년 뒤 가수 이적이 <왼손잡이>를 불렀을 때는 오른손잡이만이 바르다는 기준으로부터 매우 간단히 탈출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마치 사회적 차별에 맞선 첨병 노릇이라도 했던 양 홀대당해왔던 왼손잡이의 불운했던 처지 읍소하면서 거저 주어진 신선한 소수자의 이미지에 기생하곤 했다. 만만한 이미지 메이킹 소재였고 좋은 안주거리였다.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 다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 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  

-이적, <왼손잡이> 중에서-


그렇게 생각보다 평탄한 왼손잡이의 인생을 살아내던 중 한 교양과목 수업을 듣고는 다시 멈칫하였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 나는 요즘 내 몸의 양쪽을 모두 쓰는 연습을 해요. 평생을 오른손잡이로 살아왔는데 그런지 몰라도 몸에 불균형이 왔다는 것을 얼마 전 병원에서 알았어요. 펜을 잡을 때도, 가방을 어깨에 걸 때도, 걸음을 시작할 때도 모두 오른쪽의 신체만 썼던 거예요. 쓰지 않았던 왼쪽을 의도적으로 쓰려고 해 보는데 성공적이라면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는 성취를 이뤄 온 내가 내 몸을 쓰는 것으로는 완전히 아기와도 같은 단계입니다. 이건 낯설고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내가 내 몸의 절반을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지요. 늦었지만 이제야 소외되었던 몸의 일부를 다시 꺼내 본 기분입니다. 몰랐던 나를 다시 만나고 있어요.  이 수업이 끝나면 여러분은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멜 거예요. 어느 쪽으로 매는지 살펴보세요. 화장실 갈 사람이 있을 겁니다. 어느 손으로 휴지를 감는지 살펴보세요. 나 자신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작은 계기를 삼아 보세요......       


지금은 교수님의 이름도, 배웠던 이론도, 저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에 대한 정황도 모두 잊었지만 이상하게 저 말만은 강렬했다. 물론 수업 직후 '넌 뭔 손으로 똥 닦았냐, 귀신이 휴지 쥐어주는 대로 다' 등의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웃어넘겼지만 수업을 들었던 이들 모두 가방을 멜 때나 첫걸음을 뗄 때, 심지어 화장실에서마저 한 번쯤은 문득 떠올리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날 밤 잠들기 전 한참을 곰곰이 곱씹어 본 정도였으면 말이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다시 살펴본 나의 몸은 역시나 왼손과 왼발이 먼저 나갔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릴 때도, 다리를 꼬을 때도, 전화기를 들 때도 먼저 나타나는 것은 왼손이었다. 왼손이 나온 것을 지각하고 다시 오른손으로 대신했지만 역시나 자연스럽진 못했다.

평생 내 연민의 대상이었던 왼손은 사실상 내 몸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류 질서에 굴복한 상징으로써의 오른손은 필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좌천된 처지였다. 되려 소외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가 아닌, 주인인 나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이후 양손의 균형과 평화를 찾았냐고 묻는다면 부끄럽게도 no다.

좌우 균형에 대한 시선이 교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과 후로 나뉘는 것은 명백하지만, 나는 여전히 글씨는 주로 오른손으로, 사과는 주로 왼손으로 깎는 습성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쓰지 않는 기능을 부여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먹고사느라 허겁지겁 과업을 신속 처리하다 보니 바쁜 중에는 어색한 손을 시험해 볼 겨를이 없었고, 그 '틈틈이'란 것은 뭔가를 바꾸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코로나잠시 멈춘 시간을 선사해주었므로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던 나의 왼쪽과 나로부터 소외되었던 오른쪽에 대한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이제는 자판을 양손이나 양손가락으로 쓰는 일이 대부분인지라 오른손의 역할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왼손이 주로 짊어지던 노동의 모션을 오른손에게 덜어주었다. 달고나 커피를 수백 번 저은 것도 모두 나의 어설픈 오른손이었다. 젓가락질도 걸레질도 가위질도 오른손에게 기회를 줘본다.


효과는 생각보다 바로 나타난다. 앞선 글에서도 이미 밝혔지만 머리의 가르마도 오른쪽으로 바꾸었는데 고개를 돌리고 숙이는 방향이 달라져서인지 왼쪽 어깨 통증이 사라졌다. (가르마의 방향은 한 달 뒤에 또 바꿀 예정이다.) 왼쪽 검지에 상처가 나 물에 담그기 힘든 상황에서도 오른손의 활약 덕에 그럭저럭 따끔한 고통을 덜었던 이점도 있다.


아직도 무의식 중에 왼쪽 다리가 위로 올라가게 다리를 꼬곤 하지만, 의식적으로 왼다리가 올라간 시간만큼 오른 다리를 올려 꼰 뒤 다시 풀어놓는다. 그런 다음 공평하게 양쪽을 일직선으로 놓아 균형을 재조합할 수 있도록 한다. 아기처럼 어설프게 왼쪽의 몸을 새로 만던 교수님처럼 나 또한 낯설고 신선한 충격을 느끼면서 내 몸의 양쪽이 연대하고 동행하는 새로운 역사를 세울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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