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소설가의 장편소설이라니! 편협한 독서취향을 지닌 내가 이 책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가 황정은 덕분이다. 얼마전 읽은 작가의 에세이 [일기]에 언급된 책들을 따로 메모해놓고 하나씩 읽으리라 마음먹었는데, 작가는 이 책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38년으로 내가 내 명을 다했다면(...)서보 머그더의 [도어]를 읽지 못했을 것이고(...)"(황정은, [일기], p.33)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두 여인이 있다. 저명한 작가인 '나'는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집안일을 돌봐줄 사람을 찾는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에메렌츠'. '나'보다 20살 많은 '에메렌츠'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다. 고용인의 평판을 알아보고 일을 할지 말지 결정해 통보하겠다는 그녀에게 '나'는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에메렌츠'는 세계1, 2차 대전과 혁명이라는 시대적 고난과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 갖가지 불행을 겪으며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은 여인이다. 자신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고 곁을 주지 않는 냉랭한 성격이면서도 그녀는 늘 마을 일에 앞장서고 병든 이웃을 챙기며 갈곳 없는 동물을 돌보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한다. 비밀로 둘러싸인 '에메렌츠'가 특히 철저히 감추는 것은 바로 굳게 닫힌 그녀의 집 문 안이다. 그 집 앞마당은 항상 마을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어느 누구도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소설은 이런 '에메렌츠'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집요하리만치 그녀를 주시하는 '나'의 시선과 닫힌 그 문을 향한 의구심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에메렌츠'가 행하는 일체의 언행은 정말이지 독특함을 넘어 괴짜 같다. 자기만의 주관이 확고하고 당당해서 한편으론 오만해보인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다가도 불행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을 엿보고나면 수긍이 된다. "그러고서도 사람이 살아내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어 숙연한 마음까지 든다. 그녀의 타고난 성정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짖궂기 그지없는 운명은 그녀를 "냉철한 비관론자이자 냉소적 반이성주의자이면서 강인한 생명주의자이고 열정적 헌신주의자"(p.370)로 만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사람의 운명이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 아무리 보고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그 진실에 새삼 소름이 돋았다. '나'와 '에메렌츠'는 사사건건 부딪히면서도 서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20년을 함께 한다. '나'에게 '에메렌츠'는 살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조력자이자 엄마 같은 존재이고, '에메렌츠'에게 '나'는 글은 잘 쓴다지만 자신의 돌봄이 필요한 딸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가 '에메렌츠' 덕분에 작가로서 탄탄대로를 걷는 동안 노년인 '에메렌츠'의 육체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운명이란 것은 어쩌면 이렇게도 비정하고 잔인한 것일까. '나'가 염원해온 큰 영예를 누리게 되는 날, 두 여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닥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에메렌츠'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그녀를 추억하며 깊은 회한에 잠긴다. "지금까지 나는 용감하게 살았으며, 죽음 또한 이렇게 거짓 없이 용감하게 맞이하고 싶다. 하지만 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p.10)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알지 못했다. 애정은 온화하고 규정된 틀에 맞게, 또한 분명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대신해서도 그 애정의 형태를 내가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p.118)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최선이라 생각한 그 일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배반이 될 수 있다"는 것. 소설의 압권은 굳게 닫혀 있던 그 문이 열리는 장면이다. 팽팽한 긴장감에 숨까지 죽이며 읽는데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잠시 책을 내려놓아야 했다. 공허감인지 무력감인지 모르겠으나 어쩐지 슬펐다.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에서 지하실 문이 열리는 장면이 연상되며 삶과 죽음이라는 그 희미한 경계선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했다. "마치 어떤 봉우리에, 햇살을 받고 서서 그 뒤에 얼마나 길고 험난한 길이 남아 있는지, 자신도 등골이 서늘한 채 뒤를 돌아보는 사람 같았다."(p.203)
누구에게나 '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조차도 의아해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뿐더러 보여줄 수도 없는, 내면의 그 무엇. 그것을 숨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도어]는 그 '문'을 감추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슬픈 본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그 '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뤄야 하는지를 말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