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뿐인 언젠가

[한 명], 김숨

"나도 피해자요.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70년이 넘게 걸렸다."(p.236)
지독하게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 속에서 현재보다 더 생생한 과거를 살아온, 과거가 바로 현재인 삶을 살아온 '한 명들'의 이야기.

정부에 등록된 240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중 현재 살아계신 분은 16명이라고 한다. 게다가 살아계신 16명 모두 85세 이상의 고령자이고.

[한 명]은 김숨 작가의 아홉 번째 장편소설로 일본군 위안부의 끝나지 않을 아픔을 그린 이야기다. 고려인 강제이주를 다룬 작가의 다른 작품 [떠도는 땅]을 읽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런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역사'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처참하게 파괴되고 훼손되었으나 결국 그 '역사'마저 외면한 수많은 개인들의 불우한 삶에 대해서. 흔히들 말하는 '역사의 희생양'이라는 표현으로 이들의 삶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도대체 '운명'이라는 건 무엇일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한 인간의 삶 전반에 드리워져있음이 분명히 느껴지는 '운명'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 생존에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분뿐인 그 어느 날을 시점'으로 시작된다.

아흔 세살의 '그녀'는 13살 때 고향마을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다가 일본군들에게 납치되어 만주 위안소에서 7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하고 5년을 떠돌다 1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한밤중에 깨어서도, 길을 걷다가도, 버스를 기다리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주먹으로 가슴을 친다. 자신이 더럽게 생각되고 수치스러워서. 70여 년이 지나도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죽어 혼이라도 돌아오고 싶었던 고향에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살아 돌아온 곳 또한 그녀에게는 지옥이었다. 글자도 배우지 못한 채 끌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식모살이나 식당일, 행상 등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남들에게 위안부였다는 게 알려질까 두려워 오랜 세월 숨어지낸 '그녀'의 삶은 가난하고 고독하다.


작가는 '그녀'가 만주에서 겪은 참혹한 경험을 실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무수한 증언으로 구성했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소설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세상 속에 따로 떠돌던 이야기들을 '그녀'의 기억으로 온전히 완성'시키고자 했는데, 이것은 이 책 말미에 수록된 316개의 각주들이 증명한다.

밭 매다가, 목화 따다가, 물동이 이고 동네 우물가에 물 길러 갔다가, 냇가에서 빨래해 오다가 납치당한 소녀들과 간호사 시켜준다고 해서, 옷 만드는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따라온 소녀들 중엔 12살 '애기'도 있었다. 그렇게 억지로 만주 위안소에 끌려온 어린 소녀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참혹하고 추악한,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들을 겪는다. 차마 입에 담기도 무서운.

분통이 터지고 울화가 치밀어 책을 내려놓고 숨을 고른 적이 수없이 많았다. 약소국 국민으로,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난 죄(?)밖에 없는 당시 어린 소녀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일본의 후안무치한 작태를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그동안 단지 역사책에 나오는 끔찍한 사건 정도로만 여겨왔던 나의 무관심과 무신경함이 너무 부끄러워서 더 화가 났다. 최근에도 종종 기사화 되는 평화의 소녀상 문제, 일본을 상대로 한 이용수 할머니의 재판 등을 무심히 지나치기만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작은 책 뒤에라도 숨고 싶었다.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 피해자, 이중 정부에 등록한 240명 그리고 현재 생존해 계신 16명. 어쩌면 이 소설의 주인공인 '그녀'처럼 지금도 차마 등록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는 할머니가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를 머리와 몸으로 생생하게 기억하는 살아계신 할머니가 단 한 분뿐인 어느날이 머지 않아 오리라는 점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 '한 명들'이 되어야 한다.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도 전에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라는 '운명'의 구렁텅이에 빠져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온 '그녀들'의 생생한 증언이 생생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도록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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