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고양이 윈디캣 Mar 29. 2020

명화를 감상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들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어쩐지미술에서뇌과학이보인다 #에릭캔델 #읽는고양이 #윈디캣


미술에 대한 관심의 정도는 아주 얕은 편이다. 그러다 간혹 가슴을 때리는 그림들을 보면 그 그림을 창조한 창조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곤 한다. 또 그 화가의 생애 스토리와 함께 그 창조력의 깊이에 감탄했었다. 대표적으로 #빈센트반고흐 와 #장미쉘바스키아 가 있다. 두 아티스트는 삶의 이야기와 함께 작품 속에서 뿜어 나오는 내공으로 나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평생 안 갈듯한 미술전시관을 찾아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관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명화들은 왜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예를 들면 #몬드리안 이라든지 말이다. 이 책은 명화들이 사람들의 뇌의 어떤 기능으로 감상자의 마음을 사로잡는지에 대해 설명해주는 책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좌), 장 비쉘 바스키아(우)

항상 모든 분야의 책을 내 중심 분야인 #음악 과 함께 생각하곤 하는데 이 책은 그런 부분에서 나에게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떤 이미지를 선, 색, 형태, 빛이라는 본질적인 요소로 환원하여 감상자에게 뇌의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우리는 현실과 똑같은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몬트리안의 추상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현실과 똑같은 그림을 보게 되는 우리의 뇌는 시각정보를 상향 작용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추상화를 보면 어떤 이미지가 선과 면 혹은 색상으로 환원되어 감상자 각자의 창조행위를 통해 하향 작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우리 뇌는 눈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다른 수많은 정보들과 함께 종합하여 판단한다. 고양이의 털을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을 사람은 쉽게 '이건 고양이 털이야'라고 구분할 수 있지만 인공지능은 구분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유아시절부터 쌓아온 경험에 의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몬드리안과 다른 유명한 추상화가들의 그림을 볼 때 우리의 뇌는 시각적 정보에만 의지하게 되면 지극히 단순한 도형이며 단조로운 색깔일 수 있지만 경험적 정보와 함께 뇌가 받아들이게 되면 그림은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나무가 되고 폭풍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술과 뇌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 책이다. 아마 다른 수많은 예술분야에서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본다. 특히 얼마 전에 읽는 #콘텐츠의비밀 에서 보았던 2차원 평면에 표현된 선과 정보의 양이 성인과 아이들의 관심 정도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고양이 인식(좌), 콘텐츠의 비밀(가와카미 노부오, 우)

‘화가에게 창작과정은 해석의 과정이기도 하며, 감상자에게 해석과정은 창작과정이기도 하다’ 화가가 어떤 심상을 자신의 뇌의 기능을 이용해 2차원 평면의 캔버스에 표현하고 그 캔버스를 보는 감상자는 각자의 뇌 속의 기능을 이용해 창조적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대로 라면 우리는 그리는 행위 자체가 보는 행위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시간은흐르지않는다 의 세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과 함께 한다면 한 장의 그림은 창조자와 감상자를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술은 그런 의미에서 어떤 과학적 해석으로 설명할 수 없이 행하는 인간 고유의 범우주적 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간에 대한 생각을 통째로 흔들어버린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카를로 로벨리 저)

영화 #아이로봇 에는 윌 스미스가 인간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며 인공지능 로봇과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윌 스미스는 인간은 명화를 그릴 수 있지만 로봇인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때 로봇이 #당신은그릴수있나요? 라고 반문하는 부분에서 반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화가가 명화를 그리고 그 명화를 바라본 사람은 하나의 사건이다.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 화가와 명화와 윌 스미스가 연결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로봇의 반문에 윌 스미스가 말문이 막히지만,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윌 스미스가 명화를 바라보며 명화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명화를 완성시킨 행위이다.(사건이다) 

영화 아이로봇

오늘 서평은 다른 책과 영화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아직 확신할 수 없는 가설로 빠져들게 되었는데 여러 분야의 책을 번갈아 읽다 보니 이런 가정들이 머릿속에 많이 떠오르게 되는 것 같다. 감각과 지각, 사실과 환상, 그리고 사물이나 명화를 바라볼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이 궁금하시다면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미술작품을 보는 것은 감상자 쪽의 창작과정을 수반하는 행위'라는 것만 알고 있어도 수많은 명화들을 바라보며 즐겨야 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대는 바야흐로 ‘펭수의 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