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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88

벌써 몇 번째 같은 이정표를 지나치고 있는 것 같다. 88고속도로에 오른 지 두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지리산을 넘어서지 못했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량 대시보드의 시간은 12시 30분을 넘어서고 있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전방만 주시하며 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수석에 곤히 잠들어 있는 후배 진솔을 흔들어보지만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금 전 회식 장소에서 급하게 마시더니 술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 같이 고민하면 좋으련만 창문에 기대 잠든 모습이 얄미워진다. 한동안 지나가는 차는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왕복 2차선 88고속도로 가운데 주황색 중앙 분리대만이 이곳이 도로임을 알려주고 있다.
‘대구 92km’
다시 한 번 저 이정표를 지나쳤을 때 더 이상 조금 전 회식 때 반주로 마신 소주 서너 잔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휴대전화는 신호없음 표시를 보여준 지 오래다. 의지할 것 하나 없이 우린 도로를 끊임없이 달리고만 있었다.
‘지리산 휴게소까지 1km’
대구 방향 지리산 휴게소 이정표가 보일 때 이제는 멈춰 세워 생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잠깐 휴게소에 들러 생각을 정리해본다면 이 상황이 조금은 정리될지도 모른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대구 방향 지리산 휴게소에 진입한다. 바로 그때, 건너편 광주 방향 지리산 휴게소에서 나오는 흰색 차량의 불빛이 보인다. 적어도 우리 차만이 고속도로에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난 어느 정도 안심하며 천천히 휴게소로 진입했다.
휴게소는 뿌연 암흑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불빛은 꺼져있었고 오로지 화장실 불빛만이 새어나왔다. 휴게소는 흡사 커다란 괴물의 입김 같은 안개를 모조리 머금고 있는 모습이었다. 화장실 불빛이 잘 보이는 곳에 스타렉스 차를 세운 다음 조수석 후배를 흔들어본다.
“야 차진솔 일어나봐!! 일어나봐!!”
이쯤 되면 일어날 만도 한데 진솔은 도무지 꿈쩍을 하지 않는다. 마치 죽은 듯 잠만 자고 있다.
"자식아 그만 좀 쳐 자고 일어나봐”
한동안 흔들어 깨워보지만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다. 이내 단념하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밤 12:33분, 내내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에 반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 작은 안도감을 느낀다.
‘일단 세수부터 하고 보자’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지만 우리 차를 제외하고 어떤 차도 주차되어 있지 않다. 크다고 할 순 없는 휴게소는 편의점마저 불이 꺼져있었다. 커피 자판기의 불빛과 장난감 뽑기 기계에서 나오는 기계음이 자정의 휴게소를 더욱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휴게소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세면대 거울을 쳐다보니 눈동자 아랫쪽에 핏기가 보였다. 근래 무리한 업무로 충혈될 기미는 보였지만, 이건 충혈 정도가 아니라 안구의 실핏줄이 터져 핏물모양으로 맺혀 있었다.
‘에휴 이거 없어지려면 며칠 걸리겠는데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면대 물로 눈을 비벼 씻어보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안구 저 안쪽에서 일어난 출혈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취기를 몰아내 본다. 초겨울 밤공기가 안개와 함께 폐 속으로 가득 차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냥 못 간다고 할 걸 그랬나? 아씨’
급하게 회식 장소에서 결정된 출장이었다. 충분히 마다 할 수도 있었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직원이 너무 많이 마셔버린 탓에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의료기기 판매업은 주로 병원을 상대하기 때문에 최대한 빠른 시간에 AS대응을 해야 한다. 환자는 의료기기가 고쳐질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조수석에서 자고 있는 후배 녀석은 업무 담당자이기 때문에 더욱 피해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기에 우린 이 새벽에 광주에서 대구로 향해가고 있다.
차가운 공기를 충분히 마신 뒤 다시 차를 향해 걸어갔다. 시동이 켜져 있는 스타렉스 차량 앞에 서서 담배 한 대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때 전원이 들어와 있지 않은 블랙박스가 눈에 띄었다. 전원 문제로 자주 말썽을 일으킨다는 차량 관리담당의 말이 생각났다. 회사는 출장용 차에 대해서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지원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내비게이션은 진작에 고장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개인차량으로 출장을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내일 다시 광주로 돌아가면 또 고장 났다고 담당자에 전해줘야겠다.
차량의 문을 열자 실내등에 불이 들어왔다. 후배는 아직도 세상모르게 자빠져 자고 있었다. 지금 시간 12:52분, 너무 늦기 전에 거래처에 도착해서 업무 처리를 해야 한다. 그 쪽 병원은 우리를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쉴 수 있는 건 업무를 처리한 그 다음 일이다.
천천히 차를 몰아 휴게소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후배가 눈을 떴다.
“아 으 선배 여기 어디에요? 다 와가요?”
“얌마 다 오긴!! 넌 선배 운전시켜두고 잠이 쳐오냐?”
“죄송해요. 아까 너무 급히 마셔서 이제야 술이 좀 깨는 것 같아요. 선배님은 안 피곤하세요?”
“피곤해도 어쩌겠어. 얼른 도착해서 급한 것부터 해결해야지”
“근데 지금 휴게소에서 나가는 길이예요?”
“금방 지리산 휴게소 지났어”
“아 나 오줌 마려운데”
“금방 나와서 못 돌아가”
“그냥 유턴하면 안 돼요? 88고속도로인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됐어. 조금만 참고 다음 휴게소에서 해결해”

운전대를 다잡고서 우린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하고 위험하지만, 낮에 보면 꽤 운치가 느껴지고, 밤이 되면 스산한 느낌이 드는 곳이 88고속도로이다. 사람들은 이 고속도로를 오를 때마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도로의 퀄리티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81년 착공하여 84년에 완공된 뒤 한 번도 재공사를 하지 않은 오래된 도로이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급하게 공사를 시작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좁은 도로이기도 하다. 바닥은 고르지 않고 중앙분리대가 없으며 게다가 왕복 2차로의 위험한 도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전자들은 조심스럽게 운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통사고율은 높지 않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사망률이 상당히 높다. 대부분의 사고는 앞지르기에 의한 정면충돌이거나 저속 대형차량에 의한 사고이다. 가끔 나타나는 터널은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좁고 산 자체를 타는 듯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다. 하지만 대구와 광주를 잇는 유일한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이 오래된 도로는 대체될 여지 없는 선택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고속도로를 ‘죽음의 고속도로’라고 부르기도 했다.
차 안의 고요함이 껄끄러워져 진솔에 이야기한다.
“적적하니깐 라디오나 틀어줘”
“아 예”
진솔은 카 오디오의 상태를 라디오로 맞춘 다음 이리저리 주파수를 맞춰 본다. 하지만 라디오는 잡음만 뱉어내고 있다.
“이거 왜 이러지?”
전국에서 공통으로 잡히는 FM주파수 라디오 방송은 노이즈가 아닌 무음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차안과 도로의 고요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그런 무음이었다. 진솔은 이리저리 주파수를 옮겨보다 이내 포기하고 차량 대시보드를 뒤져 음악 CD라도 있을까 싶어 찾아본다. 하지만 출장용 회사 차에 그런 것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이번 출장은 내내 무음으로 보내야 할 모양이다.
“관둬라. 정신 사나우니깐!”
부스럭 대며 찾아대는 진솔을 진정시키고 온전히 운전에 집중한다.
잠시 뒤 멀리서 저속 트럭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참 만에 만나는 다른 차다. 덩치 큰 트럭이 워낙 저속으로 운행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앞지르기를 해야 한다. 트럭의 바로 뒤편까지 도달했을 때 마침 내리막 도로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트럭은 LPG 가스 운반 차량이다. 녹색과 노란색의 조합으로 유류회사 로고가 아주 크게 붙여져 있다. 트럭 뒷부분에 바짝 차를 붙이고 중앙선을 넘어가는 앞지르기 할 준비를 한다. 트럭 뒤에 붙어 있는 ‘위험 주의’라는 표시가 우리 차 헤드라이트에 바로 비추어져 유독 눈에 띄었다. 중앙선 너머 반대편 차선을 주시하고, 마주 오는 차량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속도를 올리며 천천히 중앙선을 넘어섰다. 그리고 트럭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가며 앞지르기를 시도했다. 그런데 트럭은 우리 차가 앞지르기를 시도하는 것을 알면서도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내리막이기 때문에 차의 무게와는 상관없이 트럭도 우리 스타렉스의 속도를 맞춰갔다. 중앙선을 넘어선 채 앞지르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며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옆에 앉은 진솔 역시 조수석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붙들고 있었다.
‘아 뭐야 이 새끼!’
옆에 있던 진솔도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욕설을 하고 있었다.
이러다 앞에서 갑자기 차라도 나타나면 정말 큰일이다. 엄청난 위협을 느끼고 액셀러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았다. 속도를 올려 겨우 트럭을 앞질러 간 다음 다시 원래의 차선으로 돌아갔다. ‘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앞지르기였다. 우리를 골탕 먹이려 했던 트럭은 다시 천천히 자신의 페이스 속도로 낮추며 멀어져 가는 것이 백미러를 통해 보였다. 그러다 앞에서 잠깐 보이는 쌍라이트, 섬광
앞에서 오던 차량의 쌍라이트 불빛에 눈이 부시다 어느 순간 수그러들었다. 전광 등을 다시 내린 모양이다. 그런데 라이트를 내린 마주 오는 차량이 보이지 않는다. 도로는 다시 고요로 접어들었다. 그러다 다시 나타난 이정표.
‘대구 92km’
이젠 확실히 확인되었다.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나는 진솔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진솔아 우리 아까 저 이정표 지나왔어. 대구 92km”
“예? 그게 무슨 소리세요?”
“너 자고 있을 때 저 이정표 지나왔다고”
“에이 무슨 소리예요? 선배 아까 회식 때 한 서너 잔 마시는 거 같던데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야 지금 장난 하는 거 아냐, 조금만 더 가면 지리산 휴게소 나올 거야 너 깨어나기 전에 들렀던 휴게소”
“……무섭게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말고 일단 가봐요”
도로의 고요는 다시 이어지고 침묵이 차 안 공기를 데울 때쯤 다시 이정표가 나타났다.
‘지리산 휴게소까지 1Km’
“봐 내말 맞지?!”
“선배 아까 다른 휴게소 들렸던 거 아니에요?”
“얌마! 88고속도로에서 지리산 전 휴게소면 남원휴게소가 다야! 거긴 진작에 지나갔고!!”
“그럼 일단 휴게소에 들러서 선배가 갔던 데가 맞는지 확인해 봐요. 저도 어차피 화장실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케이 알았어!”
또 다시 대구 방향 지리산 휴게소로 진입하는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득 건너편 휴게소에서 나오는 차량 불빛이 보였다. 그런데 그 차량의 모습이 좀 전에 진입할 때 보였던 차량의 색깔과 모양이 똑같았다. 하얀색 그랜저 차량이었다. 차 안에 몇 사람이 타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같은 차임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진입로를 둥글게 돌아 들어가 안개로 둘러싸인 지리산 휴게소가 눈앞에 보였을 때, 이젠 이 상황이 제발 꿈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착각이 아니라 분명히 조금 전에 왔었던 바로 그 휴게소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남겨두고 후배 진솔을 차를 세우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확인 한 후, 난 차에서 내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뒤 이 상황들을 정리해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어떤 설명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중간에 길이 어긋났을 리도 없고, 우리가 유턴해서 돌아왔을 리도 없다. 이 고속도로에서 같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려면 적어도 유턴을 두 번 해야 한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손끝까지 닿아오는 담뱃불을 바닥에 털어 끄는 순간, 지리산 휴게소로 진입하는 차량 불빛 하나가 보인다. 입구로 진입한 차량은 바로 조금 전 반대편 차선으로 나갔던 하얀색 그랜저 차량이었다. 흰색 그랜저 차량은 휴게소 입구로 들어온 뒤 주차할 생각이 없는지 출구를 향해 천천히 향해가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그랜저 차량은 우리 스타렉스를 지날 때 즈음 서서히 창문이 내렸다. 그 때 난 차 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차 안에는 운전석과 조수석 둘, 중년의 여성과 청소년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을 보고 나는 얼어버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 표정, 무표정한 듯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그들은 서서히 차를 몰고 지나갔다. 이 새벽 고속도로에서 유턴해서 돌아온 그 차량도 이상했지만, 마치 나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온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난 다급히 그 차량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기요!! 저기요!!”
하지만 그랜저 차는 창문을 올리고서 다시 속도를 올려 휴게소를 빠져나가 버렸다.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나는 포기한 채 차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화장실 간 후배 녀석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5분 정도 시간이 지났음을 확인했다.
‘아 이 자식 큰 거면 큰 거라고 이야기를 하던지’
난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조명등의 낮은 노이즈를 뿜어내고 있는 화장실 내부를 바라보았지만 후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야! 차진솔!”
대답 없이 내 목소리를 울리고 있는 화장실에는 그 누구도 없는 듯했다. 혹시 하는 생각에 변기 칸막이를 하나씩 다 열어보았지만, 후배는 보이지 않았다.
‘안 본 사이에 나가버렸나?'
하지만 차에도 없었고 이 밤중에 어디 갈 곳도 없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 녀석이다. 기가 막힘에 화장실에서 나와 휴게소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인기척을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이 휴게소에는 나를 제외하고 어떤 생명체도 없는듯한 느낌이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차량 앞까지 가서 조수석을 확인했지만 차 안에도 없었다. 짜증과 함께 휴대폰이라도 다시 확인 하려고 운전석 차 문을 여는 순간, 차량 내부 등이 켜지면서 차 안 조수석에 앉아 있는 진솔이 보였다.
“야 너?”
“예?”
“너 화장실 갔다가 언제 왔어?”
“아까 전에 와있었죠. 선배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거 봤는데요. 볼일 보러 가신 거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야 난 너 없어져서 찾으러 간 건데…”
“왜 그래요 무섭게”
“아 진짜!” 계속되는 이상한 상황들에 짜증이 몰려왔다.
“그리고 여기 지리산 휴게소 아까 내가 왔었던 곳이 틀림없어. 난 지금 여기 두 번째 오는 거라고!”
“그게 말이 되요? 선배 아까 회식 자리에서 생각보다 많이 마신 거 아니에요?”
“야 소주 세 잔에 누가 취하냐? 그리고 아무리 취했다 해도 한번 들어온 휴게소를 헷갈리겠냐?”
“그러지 말고 가서 세수 한번 하고 오세요. 다시 출발해 보면 확실히 알겠죠”
“세수를 몇 번이나…아 말을 말자 일단 출발해보자”
거의 제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휴게소 입구와 출구의 모습이 이렇게 또렷하게 생각나는데 이게 착각이라고 생각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난 운전석에 다시 앉아 신경질적으로 기어를 변경해서 휴게소 출구를 향해 차를 몰고 나갔다. 다시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고 난 뒤 생각해보았다. 두 번의 휴게소, 다시 돌아온 그랜저, 나를 쳐다보던 사람들, 낯설지 않은 LPG 차량, 무엇인가 꼬일 대로 꼬여있는 상황이었지만 속 시원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속도를 높여 구불구불한 오르막 도로를 올라 내리막 도로에 접어들 때 쯤 난 후배와 함께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 좀 전에 보았던 LPG 차량이 저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진솔은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나에게 말했다.
“선배 아까 본 그 트럭 아니에요?”
“맞아 아까 본 딱 그 LPG 차가 맞아"
“이게 뭐예요!!? 저 차 우리가 앞질러 간 지 한참이나 됐는데.....”
말을 잇지 못하는 진솔의 모습을 보며 난 이제 모든 상황을 다시 정리해보았다. 그 결과 우린 고속도로의 같은 구간을 계속 반복해서 돌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느 지점을 기점으로 뱅글뱅글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린 그 띠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 우린 이 반복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유를 찾는 건 그다음이다. 일단 눈앞에 저속으로 달리고 있는 저 LPG 트럭을 다시 추월하기로 생각했다.
“진솔아 내 이야기 잘 들어 지금 우린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고 있고, 이제껏 우리가 본 차량들은 저 LPG 트럭과 휴게소에서 본 그랜저 밖에 없어. 아마 저 차들도 우리랑 같은 상황을 겪고 있을 거야”
진솔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저 트럭을 앞질러 갈 테니깐 넌 창문 내리고 저 트럭 운전수한테 차 세워보라고 신호를 보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진솔은 얼떨떨함을 넘어서 극한의 두려움에 빠진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이 진솔아!! 정신 똑바로 차려 이게 꿈이든 아니든 어떻게든 벗어나야 해”
난 차를 트럭 후미에 바짝 붙이고서 중앙선 너머를 주시하며 앞지르기를 준비했다. 진솔은 옆 창문을 열어 트럭 운전수에게 신호를 보낼 준비를 했다.
‘지금이다!’ 건너 차선에서 차가 오지 않음을 확인한 나는 중앙선을 넘어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순간 앞서 멀리서 보이는 쌍라이트 불빛. 어서 속도를 더 높여 앞지른 뒤 원래 차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트럭이 또 우리와 속도를 맞추며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진솔을 한쪽 팔을 빼고 트럭 운전석을 향해 손짓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난 건너편 쌍라이트 차량이 점점 다가오는 상황에 온몸을 휘감는 두려움을 느끼며 있는 힘껏 가속페달을 밟았다. 우리 스타렉스는 간발의 차이로 트럭을 앞질러갔고 쌍라이트 불빛의 정체가 눈에 보일때 즈음 가까스로 원래 차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순간 쌍라이트에 의한 섬광.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진솔을 쳐다보았다. 질린듯한 표정의 진솔은 무엇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제야 열어놓은 창문에서 세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창문부터 닫아봐 진솔아”
올라가는 창문에 비례해 바람 소리가 줄어들었다.
“손짓 보냈어?”
“예 근데 그 트럭 운전석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어요”
순간적으로 백미러로 앞질러 온 트럭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 차량 뒤에는 어떤 불빛도 없이 암흑만이 존재했다.
“확실히 본 거 맞아?”
“운전대가 살짝 보였는데 사람은 안 보였어요”
진솔은 뒤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근데 그 트럭 왜 안 따라오죠?”
그때 이정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구 92km’
아 젠장 다시 또 돌아와 버렸다.
나는 이제 이성적으로 판단할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동안 그저 멍하니 도로의 흐름대로 흘러 달릴 수밖에 없었다. 문득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고속도로에서의 시간이 공간의 이동과 함께 흐르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이유는 우리가 타고 있는 차량의 속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차량 전조등 스위치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달리고 있는 차의 모든 불빛을 꺼버렸다. 순간 온 세상이 암흑으로 만들어지고 옆자리의 진솔은 소리치기 시작했다.
“워!!! 선배 뭐 하는 거예요!!?”
“진솔아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이지?”
“네. 위험하니깐 빨리 불 다시 켜요!”
“가만있어봐 진솔아. 지금 차는 계속 달리고 있어. 그런데 속도감이 느껴지니?
“그 무슨… 어? 차 멈춘 거 아니에요?”
“아니야 난 계속 액셀 밟고 있어”
난 다시 전조등의 스위치를 올려 미등과 함께 전방 등을 켰다. 그 순간 온 신경이 불빛과 함께 나타난 도로의 속도감에 일치시켜 졌다.
“선배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지금 차타고 달리고 있는 건 맞아요?”
“모르겠다. 우리가 지금 도로를 달리고 있는 건지, 아님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순간 진솔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선배 우리 일단 차세우고, 블랙박스 확인해봐요”
“블랙박스 고장난거 안 보여? 불 안 들어 오자나”
난 블랙박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분명 블랙박스의 전원 등은 꺼져 있고 디스플레이 창도 까맣게 꺼져있었다.
“어 이상하다?? 아까 켜져 있는 거 봤는데?”
진솔은 꺼져있는 블랙박스를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며 중얼거렸다.
“아까 앞지르기 할 때 녹화되는 것처럼 켜져 있었는데.”
눈앞에 ‘지리산 휴게소 1km’ 이정표가 보일 때 난 흰색 그랜저 차량을 생각했다. 그리고 백미러를 통해 따라오는 차가 없는 것을 확인 한 후 차를 갓길로 세웠다. 그리고 진솔에게 말했다.
“아까 휴게소 들어갈 때 마다 반대편에서 빠져나가는 차가 있었거든 그 차를 따라 가보자”
“알았어요. 선배 그런데 그 전에 혹시 모르니까 블랙박스 영상 확인해 보는 게 어때요?”
진솔은 뒤적뒤적 뒷좌석 가방에서 업무용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블랙박스에서 SD카드를 꺼낸 다음 노트북에 넣고서 전원을 켰다. 노트북의 전원이 켜지고 메모리카드 폴더로 들어가 최근 영상을 확인했다. 고요한 차 안에서 노트북 불빛이 진솔과 나의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진솔이 마지막 영상 11:57 영상을 재생하자 텅 빈 도로 위를 비취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차는 한참을 달려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서 익숙한 LPG 트럭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영상 속 시선은 서서히 중앙선을 넘어간 뒤, 트럭을 앞지르기 위해 속도를 높이며 한참을 더 달려가고 있었다. 영상 속에 들리는 내 목소리는 연신 욕설을 내뱉고 있었고, 진솔은 반복해서 '선배!!'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라이트 섬광. 그리고 몇 초 뒤 블랙박스는 신음소리와 함께 아스팔트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 블랙박스에 기록되어 있다. 진솔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한참을 이리저리 되돌려보고 있었다. 짙은 한숨과 함께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진솔과 나의 내쉬는 숨 속에 스며있는 알코올 향을 느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취중에 꾸고 있는 꿈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미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분명 우린 벗어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공간에 갇혀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시간을 달려도, 몇 번을 반복해도 계속 같은 곳을 맴돌 것이다. 그때 순간 떠오르는 흰색 그랜저,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던 잊지 못할 그 표정이 떠올랐다.
운전석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멀리 지리산 휴게소가 보이는 곳을 바라보았다. 산 중턱에 위치한 양쪽 방향 휴게소의 기다란 입구 표시용 간판이 뿌연 안개 빛 속에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가 지리산 입구에 들어설 때 마다 나오던 흰색 그랜저 차량, 그 차에는 분명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이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만약 그쪽도 모른다면 함께 헤져나가야 한다. 하나씩 하나씩 시도해 보는 거다. 이 곳에 갇히게 되었다면 분명히 벗어날 방법도 있을 것이다. 다시 운전석에 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잡는다.
“진솔아,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울먹이며 고개 돌리고 있는 진솔에게 말을 건네 보지만 숨죽인 흐느낌은 그칠 줄을 모른다.
‘일단 흰색 그랜저 차량에 탄 사람을 만나자. 일단 거기까지만 생각하자’
차는 어둠을 헤치며 나아가기 시작한다. 저 멀리 휴게소 입구가 보이고 건너편 휴게소를 주시하며 우린 계속 달려갔다.
속도를 줄이며 입구에 다다랐을 때 드디어 건너편에서 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휴게소를 벗어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분명 우리 차의 존재를 저쪽도 알고 있었다. 우린 휴게소로 진입하지 않고 바로 중앙선을 넘어가며 반대 차선으로 유턴을 했다. 차가 심하게 휘청거리며 타이어가 타는 냄새가 났다. 앞선 그랜저는 브레이크 등이 살짝 들어오나 싶더니 이내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우리 차 역시 앞선 차량을 멈춰 세우기 위해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암흑의 도로 위에서 추격전이 벌어진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 몇 분여 달려 나갈 때 즈음 우린 그랜저 차량의 바로 뒤까지 붙을 수 있었다.
“진솔아 옆으로 붙을 테니깐 손짓해서 세워봐”
진솔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네' 라고 대답했다.
일단 저 차를 세워서 물어봐야 한다. 어째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인지, 당신들도 우리와 같이 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지, 대답을 들어야 한다. 속도를 높이며 중앙선을 넘어갈려는 찰나 건너편 차선에서 오고 있는 라이트 불빛이 보인다.
‘뭐지 다른 차가 또 있어???’
우린 다시 원래 차선으로 돌아온 뒤 마주 오는 반대편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려는 순간, 난 마주 오는 그 차가 LPG 트럭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LPG 트럭 바로 뒤에 달려오는 또 다른 차량 하나가 갑자기 우리 차선으로 트럭을 앞지르기 위해 넘어오고 있었다. 우리 차선으로 넘어온 그 차, 그 스타렉스 안에 나와 진솔의 모습이 흰색 그랜저 차의 라이트에 비춰지고, 미처 피하지 못한 흰색 그랜저와 부딪히려는 바로 그때, 섬광


‘대구 92km’
벌써 저 이정표를 몇 번은 지나친 것 같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이 88고속도로는 우리를 가둬 둔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된 것 같다. 조수석에 진솔은 잡히지도 않는 휴대폰 신호를 잡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그저 앞으로 달리는 것 밖에 없다.

치치익~
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오늘 저녁 12시경 지리산 휴게소 부근에서 광주방향 승용차량과 대구 방향 스타렉스 차량이 정면으로 추돌하였습니다. 사고 원인은 저속 트럭을 무리하게 앞지르기 하던 스타렉스 차량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트럭운전자 임모씨의 진술에 의하면 스타렉스 차량이 트럭 후방에서 부터 한참동안 난폭운전을 하였다고 합니다. 승용차 탑승자 전원과 스타렉스 운전자는 사고로 인해 사망하였고, 스타렉스 차량의 동승자인 차진솔씨는 병원으로 이송 중 12:52분 경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경찰은 자세한 사고원인을 조사 중이며........

88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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