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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예술, 그 너머 10

# 동생네가 이사 왔다

by 아모르파티

미용실을 운영하며 틈틈이 대입학원을 다녔다. 꼭 가고 싶은 문예창작학과가 있는 대학을 목표로 도전했다. 암기 과목이라도 만점을 받겠다고 열정이 넘쳤다, 학원에 가보니 세상에! 벌써 반년 전부터 명문대를 목표로 칼을 갈며 공부하던 학생들이 득실거렸다. 수능 예비 시험 성적이 거의 만점에 가까운 그들 사이에서, 나는 뒤늦게 합류한 늦깎이 수험생이었다. 반 편성을 위해 치른 국어 시험에서 뜻밖에도 만점을 받았다. 대입반에서 처음 나온 만점자라며 학원 선생님이 환하게 웃었다. 학생들은 '저 아줌마 뭐야?' 눈빛으로 나를 외계인 보듯 쳐다보았다. 그래, 나 아줌마다. 하지만 암기 과목 실력만큼은 너희 못지않아!


야간에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지만,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수업을 해야 했다. 미용실은 토요일이 가장 바쁜 날이라 미용실을 비울 수가 없었다. 수능일이 가까워지자 학원을 그만두고 EBS 방송 강의를 들으며 독학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학원에서 배우는 것보다 이해가 더 잘 됐다. 과학, 수학도 문제가 반복되고 숫자만 바뀌니 암기과목처럼 이해 되고 공부하는 요령을 익혔다. 방송 강의를 들으며 문제를 풀다 보니 점점 감이 왔다. 학원은 3개윌만 다니다가 그만두고 EBS 강의에 집중해서 문제풀이 하며 수능을 준비했다.


수능 날, 현역 수험생들과 같은 강의실에서 시험을 봤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나누던 한 여학생이 푸념하듯 말했다.

“제가 재수를 했는데요. 자녀 있으면 절대 재수시키지 마세요. 자기 관리 철저히 안 하면 도움이 안돼요.”

착하고 성실해 보이던 그 여학생은 과연 원하는 대학에 갔을까?

나는 내신 1등급 성적으로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학원에 들렀더니, 일찍부터 공부하던 학생들 중 누구도 대학 합격 했다고 찾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내 수능 점수가 많이 나왔다며 놀라더니 “우리 학원생 중 가장 좋은 대학에 갔네요.” 웃었다. 대학 합격에는 운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그 해에는 수능 만점자가 사상 최대 인원이 나올 정도로 고득점자가 많았다.

내가 EBS로 밤늦게까지 공부 한 것이 효과가 좋았고 매주 방송에서 나온 문제풀이에 집중했다. 수능 일주일 전에 풀어 본 시험지 문제가 고득점 올리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대학에 붙고 나니 가게 운영이 걱정됐다. 인천에 살던 동생이 말했다.

"언니가 학교 보내 줘서 좋은 직장도 다니고 시집도 잘 갔잖아. 이젠 내가 언니를 도울게!"


내가 가게 걱정 하지 않고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돕겠다며 이사를 왔다. 남편은 중학교 선생님이었고, 먼 거리 출퇴근이 쉽지 않을 텐데도 아이들 학교까지 전학시키며 가게를 맡아 주겠다고 이사를 왔다.


“언니가 해주던 손 맛이 있어야 하는데…동생분도 잘하시겠지만, 내 머리는 원장님에게 하고 싶어요.”


단골 고객들은 동생에게 머리 맡기기를 꺼려 했고, 손님은 많았지만 수익을 반으로 나누는 것보다 차라리 가게를 세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살림까지 합치니 예상치 못한 불편한 일들이 많아졌다. 조카들 아침밥 먹여서 학교 보내는 것은 남편 차지가 되어 불만이 많았다. '내가 공부하는데, 너무 많은 주위 사람이 희생하고 있구나! 미용실까지 잘 운영하려고 하지 말고 공부를 우선 순위에 두자!'

고민 끝에,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동생아, 우리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겠다.”

“어떤 마음으로 왔는데, 또 이사가라고 해. 인천으로는 창피해서 못 가.”

“나를 돕겠다는 네 정성은 무엇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맙지만, 함께 더 살면 형제간 의리 상해서 얼굴도 안 볼 정도로 틀어 질 수 있어, 서운하겠지만 결정은 빠를수록 좋은 거야! 정말 미안하다"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나의 솔직한 말에 실랑이를 벌이던 동생과 손잡고 울었다.

동생네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서 조카들 학교까지 옮기며 서울로 또 이사를 갔다. 뒷 모습을 바라보며 미안함에 돌아서서 울음을 삼켰다.


서울에서 언니 집 근처의 상가주택을 매입했다. 언니가 “방 전세 얻고 가게 월세 내느니, 융자를 끼고 상가주택을 사서 월세를 내는 셈 치고 갚아 나가라”고 조언했다.

동생은 결혼전에 미용실을 운영하며 살았던 서울 용산에 상가 주택을 사서 자리를 잡았다. 몇 달 지나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더니, 집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나 부자 됐어. 언니 덕분이야!”

“그건 네가 선한 마음으로 언니를 돕겠다고 움직였기 때문이야. 네가 복을 받을 행동을 했어.”

동생에게 좋은 일이 생기니 내가 돈을 버는 것보다 더 기뻤다. 지금 그 지역은 마·용·성이라 불리며 집값,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는 지역이다.


동생이 떠난 후, 나는 토·일요일만 예약제로 미용실을 운영하며 대학에 다녔다. 그때부터 미용실은 예약제로 전환되었고, 나는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대학교수도 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를 꾸준히 할 수 있었다. 문을 자주 닫을 수 밖에 없었지만, 변함없이 찾아 주는 고객들이 있어 고마웠다. 내가 공부를 하다 보니 고객이 지식인들로 물갈이가 되고 있었다,

미용실 문을 자주 닫을 수밖에 없었지만, 변함없이 찾아주는 고객들이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함께 나이 들며 인생을 논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심을 내려 놓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벌기로 했다. 그 결심을 지금까지 꾸준히 실천해 오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물질을 쫓지 않고 공부하기로 한 것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갈수록 삶이 빛을 발하고 있음을 느낀다.

<예쁜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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