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열네째 날, Castrojeriz
31km를 걷는 오늘! 오늘 출발 시간은 4시 20분이다. 우리 정말 대단해!
아직은 깜깜한, 한밤중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스페인의 새벽. 길가의 전등이 길을 비추고 있었지만 노란 화살표는 플래시를 켜야만 볼 수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 길을 확인하는 건 길치인 나였다. 지도를 봐도 가끔씩 방향을 놓치는 나.. 결국 길을 잘못 인도했고 다시 돌아가는 해프닝이 있었다. 일찍 출발한 의미가 없잖아! 에잇!
사방이 캄캄한데 어딨는지도 모를 개가 사납게 짖어대서 무서웠다. 얼른 지나갈게 가만히 좀 있어봐ㅠ
그렇게 한 시간을 더 걸어서야 오늘의 여정을 끝낼 수 있었다. 터덜터덜 마을 어귀로 들어설 때 '비빔밥, 고추장, 김치, 라면'이란 단어들이 보였다. 오늘 숙소는 여기구나~! 홀린 듯이 도착한 숙소에서 민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알베르게는 깔끔했다. 한국인 사장님께서 깔끔하신 분 같았다. 사람도 별로 없어서 방 하나에 우리 셋만 묵었다. 듣기론 어제 많은 순례자들이 몰렸다가 싹 빠진 거라고 한다. 운이 좋군!
숙소에는 일주일째 투숙 중인 중년의 한국인 남자가 있었다. 여섯 번째 순례길이라는 그가 내일 이곳 까리온의 일출 명소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셨는데,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긴축재정은 결심만 하고 끝난 것 같다. 그렇지만 오늘은.. 비빔밥이란 메뉴를 보고 돈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후회하지 않아!
02.07.18 까스트로헤리스에서
열다섯째 날, Población de Campos
역시나 일출 보는 건 포기. 침대에서 좀 더 뒹굴거리다가 오전 일곱 시가 조금 안된 시각, 우리는 다음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이제 가방 싸는 건 도가 튼 것 같다. 항상 같은 패턴은 아니지만 주로 이 순서로 짐을 싼다.
우선 잠들기 전, 다음날 입을 옷과 세면도구, 충전기를 꺼내 두고 나머지 짐들은 모두 정리해서 가방에 넣는다. 다음 날 눈을 뜨면 주섬주섬 침낭을 말아 침낭 가방에 구겨 넣고,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로 간다. 세안과 환복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잠옷, 세면도구, 충전기 등 꺼내 놓은 짐들을 가방 구석구석에 넣으면 준비 끝! 빠르면 15분, 길면 30분 정도가 걸린다.
새벽에 출발할 거라면 가방을 복도로 나와서 싸는 게 매너이기 때문에, 꺼내 놓은 짐을 가방에 정리하지 못한 채 복도로 나와야 한다는 것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방과 복도를 대여섯 번은 들락날락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잊지 말자 폴. 두고 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숙소에서 봤던 한국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됐다. 자전거를 타고 우리를 불러 세운 그는 이맘때쯤 이곳 양귀비 밭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했다. 지금은 밭을 갈아서 예전에 비해 크기가 작아졌다며 아쉬워했다. 서울에서 사진전도 했었다는 그는 네이버 순례자 카페에 올릴 자신의 사진을 보러 오라고 했다. 어쩌면 올해도 스페인 어딘 가에서 사진을 찍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오후 두 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메세타'라는 걸 인지했다. 왜 이렇게 힘든 가 했다. 메세타는 이곳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거대한 고원지대를 말한다. 요한 오빠가 첫 만남 때부터 일러주었던 그 메세타. 끝이 보이지 않는 평지를 걸어야 하는 그곳, 그곳을 걷고 있었다.
17km나 되는 거리를 물도, 마을도 없이 걸어야 하는 구간도 있댔는데 그곳이 여긴지는 모르겠다. 일단 지금 너무 힘들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저 지평선이 잘 버틴다 생각했던 나마저 지치게 했다.
심지어 부르고스에서부터 메세타 구간이었다고 한다. 고도 지표를 다시 확인해보니 정말 부르고스부터 경사가 거의 없다.
프로미스타에서부터 바닥나버린 체력으로 꾸역꾸역.. 당장이라도 버스를 타고 싶었는데 그놈의 자존심이 나를 막아섰다. 아니다, 자존심이라기 보단 스스로에게 실망할까 봐 그런 상황이 조금이라도 오지 않았음 했다.
조금밖에 안 남았어 차라리 좀 더 쉬었다 가자.
세시 사십 분, 오늘 묵을 알베르게는 프로미스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마을 Población de Campos의 초입에 위치해있다.
구글 지도의 위치와 다르다고 들었는데, 그냥 걷다 보면 나와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을 가게 된 이유는 모든 침대에 개인 커튼이 있다는 점! 10유로에 1인실처럼 프라이빗한 공간에 묵게 돼서 정말 좋았다. 게다가 1유로짜리 세제 하나만 구입하면 추가 비용 없이 세탁기와 건조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최고다. 이 알베르게 역시 민지의 꿀 정보였다.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로비 옆 다이닝룸에 열명 가량 되는 순례자들이 모였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다양한 국적이었다.
버스 시간표를 물으러 간 지영이가 세상 들뜬 표정을 한 채 내 침대로 뛰어왔다.
"해진아!!!"
"왜, 왜?!"
"사장님이 차 태워주신대! 너도 타고 가자!!"
심해지는 발의 통증과 쌓여만 가는 피로에 우리 셋의 발엔 테이핑 테이프가 칭칭 감겨있었다. 그래서 버스를 탈 생각에 지영이와 민지가 운행 시간을 물으러 갔는데, 친절한 사장님께서 버스 정류장이 있는 다음 마을 Carrión까지 직접 차를 태워주신다고 했단다. 함께 타고 가자는 솔깃한 제안에 차를 탈까 걸어갈까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마음이 흔들렸다. 왜냐하면.. 나도 아프고 피곤했지만.. 나는 레온까지 계속되는 메세타 구간을 걷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일모레, 까리온에서 레온으로 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또 차를 타면.. 너무 많은 거리를 뛰어넘게 되잖아..
수많은 경우를 생각하던 나는 결국 걸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왠지 부르고스 때처럼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아쉬움 없이 걸어야지. 다신 안 올 건데!
03.07.18 캄포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