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열여섯째 날, Carrión de los Condes
오전 일곱 시 반, 까리온까지 16km로 가벼운 마음으로 신발끈을 동여맸다.
어젯밤 지영이가 발라준 테이핑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80만큼 차있던 발의 피로가 20으로 줄었다. 신기할세~
내 앞에 걸어가는 노부부는 어제도 뵌 분들이다. 젊은 나를 제치고 힘차게 걷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찍느라 이리저리 셔터를 누르던 할아버지. 오늘도 두 분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계셨다.
까리온까지 남은 거리는 한 시간 정도. 도착 전 마지막 마을에서 아침을 먹고 가기로 했다. 지도 어플을 켜서 먹을만한 데가 있나 찾아보다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바로 갔다.
오늘은 하몽이 들어간 또띠야를 먹어볼까?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말을 걸었다.
"너 한국 사람이지?"
"응."
"대박~!"
"?????ㅋㅋㅋㅋㅋㅋㅋㅋ."
대박이라니ㅋㅋ 아 진짜 정말 웃겼다. 억양이.. 아주 제대로 배우셨어ㅋㅋ
오늘 내 픽은 하몽이 들어간 또띠야와 오렌지 주스! 음식을 받고 계산을 하는데 사장님께서 검지 손가락으로 'One moment.'를 외치더니 꽃병에 있는 장미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떤 걸 고를까 심사숙고하는 그의 머릿속을 그의 이마 주름이 말해주고 있었다.
"자, 한국에서 온 예쁜 소녀를 위한 장미."
"나 주는 거야? 고마워~"
오늘 아침에 데려온 꽃일까? 장미꽃이 참 싱그러웠다. 별거 아닌데도 기분이 좋았다. 두고두고 추억할 순간을 선물 받은 것 같았다. Gracias!
오늘 묵을 숙소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수녀님이 직접 체크인을 하신다. 비용은 놀랍게도 5유로에 숙박과 저녁식사 포함! 저녁식사는 순례자들이 함께 자원해서 만드는 듯하다.
오후 다섯 시엔 수녀님과 순례자가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는데, 참여한 민지의 말로는 다 함께 자기소개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했다고 한다. 배가 고팠던 지영이와 나는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우리는 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의 손뼉 치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곧 미사가 시작되니까 일어나세요~ 성당으로 갑시다~"
이곳 산타 마리아 성당에선 매일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열린다. 종교에 무지한 나는 미사가 missa, 영어라는 걸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미사는 당연하게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진행됐고, 나는 성호를 긋는 주변 사람들을 눈치껏 따라 하기 바빴다. 그냥 조용히 듣고 있을걸. 안 따라 해도 됐을 것 같다.
허리가 뻐근할 때쯤 끝이 난 미사. 처음이라 그런지 꽤 길게 느껴졌다. 성체까지 받고 난 뒤 순례자들은 수녀님의 지도 하에 재단 앞으로 모였다. 각자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인종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부님이 찍어주는 세요를 받으면 이곳에서의 일정은 끝이 난다. 아쉽게도 나는 크레덴샬을 가져오지 않아서 급한 대로 마트 영수증에 세요를 찍었다. 잘 보관해뒀다가 한참 뒤에 크레덴샬에 붙였는데 특별한 세요 같아 애착이 간다.
미사가 끝나고 순례자들을 따라 자연스레 저녁식사 테이블로 이동했다. 뒷마당에 있는 큰 테이블이 봉사해주신 분들의 요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정신없는 식사를 마치고 나니 아까 빼먹었던 수녀님과의 시간에 참석해볼걸 생각이 들었다. 조금 피곤해서 피했던 건데, 생각만큼 부담스럽지 않고 생각보다 더 특별한 추억이 됐을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면 모두 다 함께 뒷정리를 한다. 서른 명 정도 되는 순례자들이 너나 할 거 없이 그릇을 옮기고 음식물을 분리하고 상을 닦았다. 이런 단체 생활을 해본지가 꽤 오래됐지.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는, 세 다리 여섯 다리를 걸쳐도 날 알리 없는 사람들과 생활하고 있다는 게, 또 그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는 내가 새삼 신기하다.
미사도 참여하고 꽤 많은 순례자들과 얼굴도 익히고, 식사도 함께한 오늘이 참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오늘의 노래, 버즈-비망록!
까리온까지 걷기로 한 건 정말 괜찮은 선택이었다.
산티아고를 걷기 시작하면서 길에 관해서는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며 선택했던 것 같다.
낯선 땅에서의 선택들이
그게 날 성장시킨 것 같고, 한편으론 스스로를 다독여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금씩 까미노 여정의 끝을 계획하면서 한국에 돌아간 뒤의 일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잘 헤쳐나갈 것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성장하는 나를 믿는다. 04/07/18
04.07.18 까리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