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열일곱째 날, León
민지는 다음 마을로 떠나고 우린 버스를 타러 빨간 천막의 카페로 갔다. 까리온을 지나는 버스와 택시는 모두 이곳에서 정차한다. 버스 티켓도 이 카페에서만 팔고 있었다.
레온으로 가는 교통수단은 버스와 택시 두 가지가 있다. 버스는 카페 직원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돈을 지불하면 표를 받을 수 있고, 택시는 콜택시를 불러서 가는 방법인데 적은 비용은 아니라서 대부분 다른 순례자들과 수를 맞춰서 출발한다.
알베르게 체크아웃하고 버스 타기까지 근 네 시간. 긴 기다림에 성당도 다시 한번 가보고, 장터도 둘러봤다. 그리고 11시 50분, 제시간에 맞춰 도착한 버스를 타고 우리는 쾌적하게 레온을 향해 달려갔다.
첫째 날 알베르게는 버스 정류장과 멀지 않고 대형 마트와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후기가 괜찮아서 큰 고민 없이 이곳으로 왔는데 실제로 와 보니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깔끔하고 괜찮았다.
까리온 카페에서 봤던 한국분들을 숙소에서 다시 만났다. 테이블에서 쉬고 있는 이분들, 와인과 콜라를 섞어 마시고 있었다. 와인과 콜라라니?! 내게도 한 잔 권하셔서 마셔봤는데 맛이 참 묘했다. 묘했어.
오늘은 특별한 일정 없이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와인 섞은 콜라, 콜라 섞은 와인을 옆에 두고 챙겨 온 노트를 꺼냈다. 매일 한 줄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나헤라를 끝으로 텅텅 비어있었다.
일기는 처음부터 쓰려하지 않았다. 일기를 쓰다 보면 분명 그날 있었던 기분 좋지 않은 일까지 적게 될 텐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을 수 있는 감정들까지 굳이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던 감정, 특별했던 사건들로 한 줄씩 쓰려고 했었는데 개뿔 지키지 않았다. 돈 쓴 것만 칼같이 기록했다. 하하
순례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하나씩 준비해 가면서 몇 가지 다짐들을 만들었었다. '순례길'이라는 여행의 특이성 때문에 이번 여행에는 규칙과 목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10가지 목록을 만들었었는데..
목록을 만들 때만 해도 나는 길 위에서 자연을 둘러보며 사색에 잠기는, 여유로움에 한껏 취해있는 나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현실은 흐르는 땀 닦기 바빴고 다음 마을, 다음 숙소 찾아가기 바빴다.
그래서 길을 떠난 지 스무날이 다 되어가는 오늘에서야 이 다짐들이 떠올랐다.
1. 혼자 출발하는 여행일 것
2. 끝까지 즐기고 올 것
3.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잠시 쉴 것
4. 나를 숨기지 말 것
5. 영어 회화 공부해 갈 것
6. 친구 사귀고 올 것
7. 한국과 연락은 최대한 자제할 것
8. 현재에 집중할 것
9. 유서 쓰고 올 것
10. 이 여행으로 내게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여행의 최종 목적은 새로운 나를 보고 오는 것. 꾸준한 걸음으로 한계에 도전하고 오는 것. 나는 그 모습이 보고 싶다. 09/03/18
대부분 자연스레 지켜오고 있었다. 그런데 유서 쓰기.
수년 전 연예인의 가상 장례식을 콘셉트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됐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내가 모 연예인의 유언을 듣고 감명받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언젠가 한 번쯤 유서를 써보겠단 생각을 품고 살았는데, 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여행이라면, 순례길이라면 나의 마지막을 그려보기 아주 괜찮은 때와 장소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역시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이건 정말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이 여행의 시작은 앞으로의 삶을 기대해볼 만한 좀 더 나은 모습의 나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유서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마침표를 찍는, 더 이상의 앞날이 없는 나를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이 여행에서 인생의 마침표보단 쉼표가 될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마지막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마지막을 상상하려 하면 내 안에서 '아니! 이렇게 끝내기 싫은데!' 하고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지금 이 길 위의 것들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쁘다. 아홉 번째 다짐은 다음 여행으로 미뤄야겠다. 그게 두 번째 순례길이 될 지도?!
05.07.18 레온에서
열여덟째 날, León
와.. 밤새 옆 침대 남자의 코골이를 듣는 건 순례길 top 3에 드는 고역이었다. 한대 쳐서 기절시키고 싶었는데 이미 기절한 듯 잠들어있어서 속이 탔다. 나는 처음으로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았다.
오래간만에 늦게까지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늦잠 잔 듯 푹 잤는데 시간은 아직 이른 아침 일곱 시 반. 우리는 오늘 묵을 숙소를 예약하지 않아서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지금 레온에 사람이 많아서 숙소 잡기가 힘들다고 한다. 어제 사놓은 납작 복숭아를 먹으면서 숙소를 나왔다. 일단 중심가로 가자.
미리 봐 둔 알베르게 두 군데를 들렸는데 모두 자리가 없었다. 두 번째 들린 알베르게에서 근처 호스텔을 추천받아서 그곳으로 갔게 됐다.
조식 포함 25유로. 주말 가격이라 비쌌지만 더 이상 찾아다니기 귀찮아서 이곳에 묵기로 했다. 부스스한 수염에 가죽 베스트를 입은 히피 스타일의 사장님 까를로스는 자신의 팔에 주렁주렁 걸쳐진 팔찌 중 하나를 골라내더니 한국인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라며 자랑했다.
체크인 시간 전이라 짐을 풀 수 없어서 알베르게에 가방을 맡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일정은 은행 가기, 레온 성당 세요 받기, 아시안마트 들리기!
은행에 들려 돈을 찾고 아침 먹으러 가는 길, 가우디가 디자인했다는 박물관 '보티네스 저택'도 둘러보고 여유롭게 거닐다가 크레덴샬을 은행에 두고 왔다는 걸 알아챘다.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금방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달렸는데 조용한 레온의 거리에 쿵쾅대는 발소리와 쫩쫩대는 슬리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행히도 크레덴샬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잃어버렸음 끔찍했을 거야ㅠ
츄러스와 초콜릿 한 사발 하고 레온 대성당 세요를 받으러 갔다.
레온 성당 입구에서 시계방향으로 돌면 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곳에서 세요를 받을 수 있다.
머무는 도시에 아시안마트가 있으면 웬만하면 들려야 한다. 가방에 라면 두 개씩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 들릴 아시안 마트는 레온 성당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라면 종류도 많았고 가격도 저렴했던 걸로 기억한다.
근처 마트에서 쌀 사고 콜라 사고 얼른얼른! 지영이가 고기 굽고 밥과 상차림은 내가!
조합이 조합이 이 세상 조합이 아니다. 조금 차진 쌀밥에 고기, 퍽퍽함을 중화시켜줄 상큼한 파스타 샐러드 그리고 양념치킨 맛이 나는 달짝지근한 요뽀끼까지! 입안 가득 넣어주면 환상!!!!! 최고야!!!!!!! 기분 너무 좋아!!!!!!!!!!!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이 시간이 제일 좋다~
이상하게 날씨는 더운데 우리 둘 다 콧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감기인가~ 싶다가도 이 여름에 무슨 감기야~
06.07.18 레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