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열한째 날, Burgos
오늘은 버스를 타고 부르고스로 가는 날! 순례길 두 번째 버스다. 분명 부르고스에서 쉴 생각에 좋았는데, 막상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걸어가는 순례자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걷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부르고스 가는 버스 안,
걷고 있는 순례자를 보는 건 처음이다.
통증, 무의미함, 지루함,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내겐 견딜만한 것들이다.
흘려보낼 수 있다.
나도 저 길에서 걷고 싶다. 29/06/18
한 시간 십분 정도 달려서 도착한 부르고스. 버스정류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Arco de Santa María'가 나오는데, 이 문으로 들어가야 오늘 묵을 숙소가 나온다.
문을 찾아가던 중 부르고스 하늘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좀 더 가까이 가니 종소리와 함께 온갖 악기 소리들이 들려왔다. 축제하나 봐!
산타 마리아 문을 통과하면 가로수길이 나온다. 가로수 왼쪽엔 상점들이, 오른쪽엔 공원의 나무들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맑은 하늘에 선선한 공기, 초록빛의 우거진 나무들을 보고 있으니 지금 이곳은 청량 그 자체.
이 가로수길의 어느 카페를 가든 청량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우린 정하고 온 메뉴가 있어서 가게들의 입간판을 지나치며 쭉 걸었다. 우리가 찾는 메뉴는 바로 츄러스와 초콜릿! 이 분위기에 즐기기 딱 좋은 메뉴 아닌가. 초콜릿에 찍어먹는 츄러스라니.. 환상이쥬~
츄러스와 초콜릿으로 감동적인 시간을 보내고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땐 입실 시간 30분 전이었다. 입실 시간은 열두 시, 공립 알베르게로 숙박비는 5유로다.
알베르게에 막 도착했을 때 건너편 바에 앉아있던 순례자들의 시선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들 대부분이 알베르게 문 옆에 제 순서를 맡으려 가방으로 줄을 세워 놨는데, 우리가 그 차례를 침범이라도 할까 봐 눈여겨봤던 것 같다.
입실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둘씩 자신의 가방 앞에 섰다. 그런데 갑자기 앞 순서에서 남자 둘이 싸움이 났다. 몸싸움을 할 것 같아서 뒤로 물러섰는데 다행히 주위 사람들의 제지로 큰 싸움이 되진 않았다. 언뜻 보기에 맡아뒀던 자리로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거참 왜들 그러슈
알베르게 직원분들이 참 친절했다. 한국어로 반갑다고 인사도 해주시고 질문엔 미소로 응대해주셨다. 시설도 무척 좋았다. 론세에서의 숙소처럼 이층 침대 두 개가 한 공간이었는데, 론세와는 다르게 침대들이 세로로 위치해 있었다. 칸막이까지 제대로 돼있어서 남의 발 밑에서 자야 한다든지 머리를 맞대고 자야 한다는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개인 사물함까지 완벽했다. 이런 곳이 5유로라니! 딱 한 번만 묵을 수 있어서 너무나 아쉽다.
우리는 짐을 내려두고 바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늘은 중식 뷔페에 가는 날! 로그로뇨에서 가지 못했던 바로 그 식당이다. 식당 가는 길이 꽤 멀어서 가는 동안 골목마다 축제 준비가 한창인 부르고스를 구경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축제를 태어나서 처음 본다. 마치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해외 소도시 축제를 소개할 때 보여줄 것 같은 풍경이다. 엄청 큰 축제임은 분명한데 대체 무슨 축제인 거지?
어느 골목에선 머리가 흰 악단의 연주를 들었고, 어느 공원에선 아이들을 위한 인형극을 구경했다. 사람 구경, 행진 구경, 공연 구경.. 부르고스엔 즐거운 에너지가 넘쳐났다.
열한 시 반쯤, 반복되는 묵직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처음엔 누가 복도에서 이불을 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소리가 멈추질 않는 것이다. 너무 이상해서 침대 전등을 켜고 소리에 집중했는데 듣다 보니 점점 총소리 같았다.
'웬 총이야?!' 짧은 순간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멈추지 않는 소리에 위험한 상황이라 생각돼서 바로 전등을 껐다. 불을 켜면 위치가 알려질 것 같았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 1층 남자가 침대에서 나오더니 테라스를 향해 부리나케 튀어나갔다. '뭐야! 왜!!' 나도 얼른 침대에서 내려갔다. 뛰어내리듯 내려간 터라 발바닥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옆 침대에 있어야 할 친구들마저 자리에 없었다. 공포감에 심장이 덜컹했다. 놀란 심장 부여잡고 테라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창 밖으로 웬 번쩍번쩍 폭죽이..ㅎ
친구들은 테라스에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하.. 나 정말 놀랐어요..
29.06.18 부르고스에서
열두째 날, Burgos
하루 더 머물고 싶은 아쉬움을 남긴 채 공립 알베르게를 나왔다. 오늘도 똑같이 아침 먹을 겸, 다음 숙소의 체크인 시간을 기다릴 겸 카페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부르고스 성당 앞에 있는 야고보 동상에서 사진도 찍었다. 어제는 동상에 아이들이 잔뜩 매달려있었는데 오늘은 아침이라 한적했다.
오늘 머물 숙소를 정해야 했다. 그런데 구글 지도에 있는 사설 알베르게들의 후기를 읽다 보면 부르고스를 떠나 다음 마을로 가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매우 망설여졌다. 어제 머문 공립 알베르게가 가장 좋은 시설에 좋은 가격임을 한 번 더 느꼈다.
민지는 돈을 좀 더 써서 1인실 호스텔을 알아본다고 했다. 그런데 축제기간이라 빈방이 마땅치 않았다.
고민 끝에 지영이와 나는 디비나라는 알베르게에 가기로 하고, 민지는 카페에 남아 취소된 방을 기다려 보겠다고 했다.
제과점을 나와 왼쪽으로 걷다 보면 서점이 하나 나온다. 스페인 서점 한 번 구경해보고 싶었는데!
천천히 둘러보고 가이드북도 구입했다. 가이드북은 순례길 초반에 사는 게 가장 비싸다고 한다. 듣기로는 1~1.50유로 정도 차이 나는 것 같다.
이 책은 순례 일정을 34일로 나눠 정보를 정리해 둔 식인데, 이 책의 일정대로 걸을 필요는 없어서 중간에 들릴 마을, 거리, 고도, 버스 유무 등을 알아보는 데 썼다.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되어 있어서 보기 편했다. 기념품으로 구입한 건데 쓰임이 꽤 많았다.
쭉 걷다가 광장에 있는 약국에서 실리콘 밴드도 샀다. 물집 방지용이지만 나는 엄지발가락 윗부분에 통증이 있어서 엄지발가락을 보호하려고 샀다. 발가락 윗부분이 딱딱한 신발에 수없이 닿으니까 지속되는 저릿함과 함께 감각이 둔해지는 증상이 있었다. 신발이 작아서 그런 걸까, 신발을 새로 살까도 고민했는데 엄청 심각하진 않아서 사기도 애매했다.
밴드는 원하는 길이로 잘라서 사용하면 되고, 세척도 가능하다고 약사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밴드를 엄지발가락 길이에 맞게 자르고 윗부분을 실로 꿰매어 발가락에 뚜껑처럼 씌워서 걸었는데, 좋은 듯하다 가다도 필요 없는 건가 싶다가도.. 엄청난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아서 종종 낀 채 걸었다.
물집 방지에는 효과가 있을 것 같다. 내 발은 발볼이 넓고 발가락 사이가 넓어서 물집은 새끼발가락에만 생기는 정도였다. 그래서 딱히 방지할 물집도 없어서 나중엔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다시 찾아온 부르고스 성당! 행진이 한창이다.
다시 만난 노란 옷의 사람들! 어제부터 유심히 봤는데 어딜 가나 이분들의 흥이 최고인 것 같다.
열두 시 반쯤 민지를 다시 만났다. 식당이 한시 오픈이라 조금 기다렸는데 우리 말고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상그리아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정말 맛이 좋았다. 홀짝홀짝 마시고 있으니 곧이어 주문한 메뉴가 나왔는데.. 뭔가 잘못됐다. 메뉴를 잘못시켰나 보다. 웬 모둠튀김이 나왔다.. 다 튀길 줄 몰랐지..
소스는 토마토 베이스로 새큼했는데, 소스를 들이부어도 다 먹기에 느끼했다. 실패!
밥을 먹고 우리는 각자의 숙소로 헤어졌다. 부르고스 두 번째 알베르게는 중앙 광장과 가까운 디비나 알베르게. 건물의 1층엔 기도실이 있었고, 나선형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숙소가 나왔다. 기부제 숙박이지만 기부 금액은 6유로로 정해져 있었다.
화장실과 침실이 가벽 하나로 분리되어 있어서 침대에 누워있으면 화장실 소리가 다 들렸다. 샤워실도 샤워 커튼만으로 가려야 했고, 배수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씻을 때마다 발 밑은 매번 한강이었다.
짐을 풀고 한숨 돌릴 때쯤 알베르게의 정원이 다 찼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 부르고스에 사람이 많긴 한가보다.
내일은 이곳을 떠날 거라 기념품을 사러 나갔다. 부르고스가 너무 좋아서 무언갈 남기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광장 근처의 오다가다 본 기념품 샵에서 순례길 첫 마그네틱을 구입했다. 맘에 쏙 들어 :)
부르고스 대성당을 구경해보고 싶었다. 성당도 구경하고 싶고 다음 마을로 이동도 하고 싶었던 나는 내일 오전엔 성당 구경, 오후엔 가까운 마을까지만 걷는 걸로 계획을 세웠다.
지영이는 부르고스에 남고 싶어 했다. 마땅한 숙소가 없을 텐데.. 일단 내일 일어나 봐야 일정이 정해질 것 같다.
여행 일정을 당일 아침 컨디션에 따라 정하는 여행. 장기 여행의 매력 중 하나 아닌가~ 너무 좋다~
30.06.18 부르고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