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아홉째 날, Nájera
고요한 새벽, 다가오는 발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한 남자가 우릴 향해 헐레벌떡 뛰어 오고 있었다. '가족'남자였다.
"네 가방에서 떨어졌어. 네 것 맞지?"
레고를 좋아하는 지영이는 파리에서 산 상어 모양의 레고를 민지에게 선물했었다. 민지는 그 레고를 가방에 걸어뒀었는데 출발할 때 숙소 앞에서 떨어뜨렸나 보다.
우린 그의 친절함에 '미스터 프렌들리'라는 닉네임을 붙여줬다. 이후로 그가 보일 때마다 닉네임으로 부르곤 했다. 물론 우리끼리.
새벽 다섯 시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 사람들 페이스 따라잡겠다고 새벽부터 질주를 했다. 한참 걷다가 힘들면 뒤돌아 친구들을 확인하고, 또 질주하고.. 재밌었다.
그러다 수건을 잃어버렸단 걸 알게 됐다. 분명 가방 위에 올려둔 걸 확인했었는데 시내를 벗어나고 나니 없었다. 내가 좋아했는데 포카리 파란 수건..
과일 트럭에서 산 바나나를 엔진 삼아 힘차게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말이 아닌데 설마 날 부르는 건가? 뒤를 돌아보니 중년의 부부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 길로 가면 안 돼! 여기야, 여기!"
뭐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보니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판이 그제야 보였다. 후.. 순탄치 않은 하루가 될뻔했어.
마을 초입에 있는 카페에 순례자들이 모여있었다. 지나가다 한 번씩 마주쳤던 듯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마침 세 명이 앉을자리가 생겨서 이곳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착즙기로 짜낸 오렌지 주스가 정말 맛있었다. 또르띠야도 최고! 커피도 최고! 토마토까지 센스쟁이!
뻥 뚫린 길을 걸을 땐 그늘이 없어서 정말 힘들다. 지금 이 길 위에 그늘이라곤 고가 도로 밑 그늘이 전부다. 나는 널찍이 떨어져 있는 다음 그늘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푸드 트럭이 있었다. 천막이 쳐진 휴게 장소가 보여 바로 자리를 잡았다. 이곳 세요가 푸드트럭 모양이라 귀엽다.
빨간 티셔츠의 할아버지가 내 옆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마침 지영이도 도착해서 콜라를 마시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우리에게 미터 기능이 있는 장비를 보여줬는데 드라마에서 보던 옛날 무전기 같아 신기했다. 그리곤 지난날 만났던 순례자들의 이름이 적힌 기다란 막대기를 보여줬다. 우리 이름도 적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내주셨다.
이번엔 몸에 무언갈 잔뜩 달고 가는 할아버지와 걷게 됐다. 독일 사람인 그는 영어는 못하지만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안다고 했다. 이때다 싶어 묵혀뒀던 독일어로 몇 마디 떠들어봤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을 더 걸어 오늘 목적지인 나헤라에 도착했다.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그냥 계속 걸었다.
오늘은 장장 31km를 걷는 날이었다. 8시간 반을 걸었다. 너무 힘들어서 비고 뭐고 얼른 숙소에서 쉬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내가 먼저 도착해서 세명의 이름을 함께 예약했다. 우리는 4인실 개별 방을 배정받았는데 복도에서 방으로 들어가면 문이 하나 더 있는, 방 속의 방이었다. 사설 알베르게여서 프라이빗한 공간이 있었다.
방 앞에 있는 작은 테라스에선 프랑스 모녀가 책을 읽고 있었다. 올라~
로비로 나왔더니 다들 축구를 보고 있었다. 월드컵을 하는 줄도 몰랐다. 출국하자마자 매일매일이 정신없어서 한국의 소식을 들은 지 열흘이 넘었었다. 빨래 기다릴 겸 같이 앉아있었는데, 세상에 우리가 골을 넣었다. 그때부터 너무 재밌어졌다. 두 번째 골을 넣었을 땐 함께 경기를 보던 독일 아저씨의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독이 한자리에 있다고 마냥 재밌어했다.
경기는 예상 밖의 승리로 끝났고, 이날 이 경기는 순례길 위에서의 뜻밖의 즐거움이 되었다. 역시 스포츠는 함께 봐야 재밌어!
숙소로 돌아오니 1층 침대에 프랑스 남자가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잘 준비를 하는데 그가 갑자기 벌레를 쫓기 위한 조치를 취해도 되냐고 물었다. 냄새가 좀 날 거라고 해서 오렌지향이나 무향으로 된 에프킬라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가 피운 향은 나선형 모기향이었다. 시골집에서나 보던 걸 스페인에서 보다니. 그렇게 진한 걸.. 심지어 방문을 닫고 자서 향은 더욱 깊고 진했다.. 고맙다.. 벌레 쫓아줘서.
오늘 숙소에 도착했을 때부터 지영이가 많이 지쳐있었다. 쉬고 싶은데 나 때문에 일정을 소화해내는 것 같았다. '부르고스에서 쉬자. 조금만 더 힘내자.'라고는 했는데 일단 내일 일어나 봐야 알 것 같다. 어쩌지..
27.06.18 나헤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