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여덟째 날, Logroño
이 길이 맞는 건지 긴가민가했다. 구글 지도에 있는 'Camino de Santiago'는 우릴 갓길로만 인도했다. 차선이 늘어나고 길도 복잡해져서 자꾸만 지도를 확인해야 했다. 주변이 어두워 노란 화살표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갓길을 지나 산길이 시작될 때쯤 다른 순례자들을 마주쳤다.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됐다.
에스떼야부터 30분쯤 걸었을까. 캄캄한 산길을 따라 마을 하나도 지나왔고, 와인 수도꼭지가 있다는 마을 Irache의 시내도 코앞이었다. 와인 수도꼭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온 게 아니어서 직접 찾아봐야 했다.
마을 초입에 있는 와인 농장에서 멈췄다. 와인 박물관도 있고 왠지 이쯤인 것 같은데, 수도꼭지는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앞 공터에서 기웃거리며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더 이상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이라체 시내 안에 있는 와인 농장인가? 발걸음을 떼려는 차에 서너 명의 순례자들을 마주쳤다. 이들에게 물어보니 저 아래 철문을 열고 들어가야 된다고 했다.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벽면에 수도꼭지 두 개가 붙어있었다. 왼쪽엔 와인, 오른쪽엔 물. 신기했다! 맛은 와인 맛이었다.ㅎㅎ 공복이어서 맛만 보고 다시 물을 담았다.
초등학교 전교회장 선거 때가 떠올랐다. 후보에게 운동장 식수대에서 환타가 나오게 해 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었는데,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보니 그때 생각이 났다.
멋진 일출 감상도 잠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걸어선 안 되는 곳이란 걸 깨달았다. 우린 이라체 마을부터 산티아고로 가는 고속도로를 걷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중간 마을에서 빠지면 되겠다 싶었다. 처음엔 스페인까지 와서 우리 멋대로 한다고 신나 했는데 계속 걷다 보니 걸을 수 없는 길이 나왔다. 누가 봐도 안전하지 않은 길이었다.
돌아가기에도 너무 먼 거리여서 옆으로 빠져야 했다.
도로 밑에 있는 작은 굴다리의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이라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너무 가팔랐다. 게다가 썩은 나무들과 발목까지 오는 무성한 풀, 가시나무들이 사방천지에 깔려있었다.
지영이가 먼저 내려가고 내가 내려갈 차례인데 자꾸만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상상됐다. 오늘 늦잠도 안 자고 처음으로 다섯 시에 출발하고.. 시작이 참 좋았는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세상만사가 다 원망스럽고 스스로에게 짜증도 났다. 아주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폴을 짚어가며 내려갔다. 쓸데없이 두 개나 샀다며 하찮게 여기던 폴이 지금 내게 한줄기 빛이 돼 주었다. 이런 데서 쓰게 될 줄 알았나.
아무 탈 없이 내려오긴 했는데, 이 사단을 겪고 나니 오늘 하루의 여정에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지영이에게 물었다.
"지영아 나.. 버스 타고 싶어.."
"콜."
"ㅋㅋㅋㅋ"
우선 가장 가까운 마을인 Azqueta로 향했다. 이제 막 일곱 시를 넘긴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지도를 보니 마을도 굉장히 작았다.
입간판을 들고 오픈 준비를 하는 바 사장님을 마주쳤다. 그에게 듣기로 이 길 끝에 버스정류장이 나온다고, 거기서 8시 40분 차를 타면 될 거라고 했다.
어디서 몇 시에 타는지 알았겠다 우린 오늘 아침 출발했던 그때처럼 여유를 되찾았다. 마침 카페도 오픈 준비를 끝내서 여기서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정류장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됐다. 가는 길에 식수대에 들러 물을 받고 있는데 익숙한 차림의 실루엣이 우릴 향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민지였다.
"우리 로그로뇨 가는데.. 같이 갈래?"
버스 도착 직전까지 고민하던 민지는 우리와 함께 로그로뇨행 버스에 올랐다.
한 시간 만에 로그로뇨에 도착했다. 순례길 두 번째 도시인 로그로뇨는 팜플로나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적했던 팜플로나의 신시가지 느낌이었다.
알베르게 오픈 시간까지 머물 곳이 필요했다. 우리는 로그로뇨에 오면 들리기로 한 카페가 있다는 민지를 따라갔다.
카페는 로그로뇨의 어느 공원 안에 위치해 있었고 숲 속의 오두막을 연상시키게끔 꾸며져 있었다.
카페에서부터 십여분 걸어 도착한 오늘의 알베르게. 이제 열두 시 반인데 벌써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들 몇 시부터 걷길래 이렇게 일찍 도착한 걸까?
이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피레네에서 본 프랑스 모녀, 론세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했던 까를로스, 수비리 계곡에서 본 '가족'남자. 이 남자는 등에 한자로 '가족'을 문신해서 기억에 남았다.
사실 까를로스 아저씨는 수비리에서도 마주쳤었다. 론세에서의 저녁식사가 마지막 만남인 줄 알고 굉장히 훈훈하게 마음속에 담아뒀는데 생각보다 자주 마주쳐서 머쓱했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팜플로나에서 2박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로그로뇨에 도착하는 게 맞았다. 같이 출발했던 분들은 꾸준히 걸어왔나 보다.
분명 버스를 타고 왔는데 걸어온 것처럼 피곤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더위속에서 오픈 시간을 기다려서 그런 것 같다.
숙소의 문은 정확히 두시에 열렸고 순례자들은 침대를 배정받기 위해 하나둘 줄을 섰다. 차례가 되어 1회용 침대 시트를 건네받고 여권과 크레덴샬을 보여줬다. 그런데 내 크레덴샬을 보던 직원은 어제 머문 곳이 에스떼아냐고 물었다. 뜨끔했다. 왜 물어보는 거지?
"YES!"
뭐 문제 있냐는 듯 싱긋 웃었다.
간단히 먹기로 한 저녁. 햄버거를 먹을 때부터 배가 아팠다. 더워서 그런 건지 물갈이를 하는 건지 설사를 했다. 장염인 것도 같아서 일단 챙겨 온 처방약을 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유심을 샀다. 그동안 파리에서부터 카페와 숙소의 와이파이로만 생활했었다. 크게 불편함은 없었는데 이제 적응도 했겠다 있어야겠다 싶었다. 지나가다 보인 오렌지 매장에서 한 달 동안 쓸 수 있는 10GB를 20유로에 구입했다.
그건 그렇고 숙소가 정말 너어무 더웠다. 지금까지 다녔던 곳 중에서 제일 더웠다. 가만히 있어도 온 몸에 땀이 찼다. 찜통더위에 배앓이까지.. 잠은 자야 되니까 꾸역꾸역 눈을 감고 선잠에 들었는데 귓가에서 '띠리링'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누군가 에어컨을 튼 것이다. 에어컨이 있는 줄도 몰랐네. 젠장.
내일도 오늘처럼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확실히 새벽에 출발해서 2~3시 전에 일정을 마치는 게 좋은 것 같다. 사실 가장 베스트는 12~1시 전에 걷기를 마치는 건데, 짧은 거리가 아닌 이상 나에겐 무리였다.
하나하나 조율해가는 걸 보니 경험이 쌓이는 게 느껴진다. 잘 적응하고 있군 :)
26.06.18 로그로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