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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진 Jul 08. 2019

그날의 공기까지 담아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산티아고 순례길




여섯째 날, Puente La Reina



6시 30분, 새벽에 출발하는 길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조식으로 제공되는 시리얼로 배를 채우고 양치까지 끝냈다. 지영이를 기다리던 나는 갑자기 아빠가 보고 싶어 졌다. 시골에 가있던 아빠는 할머니와 함께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할머니 얼굴도 뵀다. 할머니는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아실까? 궁금했지만 길게 설명하진 않았다. 곧 출발해야 하고 숙소엔 아직 잠들어 있는 순례자들이 있었다.

아빠와 할머니의 무탈한 모습을 확인하니 안도감이 들었다. 통화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준비를 마친 지영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여섯 번째 아침, 우리는 레이나를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스페인 따릉이! 아따 공기 좋다~


팜플로나가 넓어서 벗어나는데만 40분 정도가 걸렸다.


뭐 하고 있어~


사진을 보면 저 멀리 산등성이를 따라 흰색의 기둥들이 세워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팜플로나를 벗어날 때부터 보였던 이것은 풍차다. 요한 오빠 말로는 오늘 보게 될 용서의 언덕이 저 풍차가 있는 산을 올라야 나온다고 했다. 아깐 정말 까마득했는데 40분 정도 걸었다고 꽤 가까워진 것 같다.



작은 언덕을 순식간에 올랐다. 청명한 하늘 아래로 내가 지나온 마을, 드넓게 펼쳐진 밀밭, 각자의 속도로 길을 오르고 있는 순례자들을 보고 있으니 꿈속에 있는 것 마냥 시야가 아득해졌다. 배가 고파서 잠시 어지러웠던 건가?


모든 게 아름다웠다. 모든 게.


이쯤부터 내가 한 시간에 얼마큼 걸을 수 있는지 파악됐던 것 같다. 고작 30분 만에 이만큼이나 걸을 수 있다는 것. 집에서 뒹굴거리면 무의미하게 사라질 30분이 이곳에선 여러 가지 풍경들로 날 자극시켰다. 두 다리와 어깨의 통증 그리고 지도로 확인되는 내가 걸어온 거리들이 날 보람차게 했다.


보람찬 시간을 보내는 나를 아주 오랜만에 느껴본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지금의 나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닌 채 지나갈 시간들을 지금처럼 꽉 찬 순간들로 보낼 수 있을까.


기억하고 싶었던 꽃향기. 지금은 기억나지 않아 조금 슬프다.


풍차가 많이 가까워졌다.


아홉 시 십분. 마을로 들어온 우리는 장미가 예쁘게 피어있는 가게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레몬 안 올려주면 섭할 뻔~


꿀 같은 휴식을 갖고 다시 가방을 멨다. 어느 골목의 돌계단 앞에 멈춰 선 오빠는 우리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전에 같이 걸었던 순례자들과 사진을 찍었던 장소라고 했다. 사진 속 위치를 똑같이 잡아줘서 나는 셔터만 누르면 됐다.

사진을 다 찍고 이동하려는 차에 갑자기 민지가 튀어나왔다.


"먼저 갔는데 이제 여기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반가워서 너무 웃겼다.


요한 오빠가 찍어준 민지와 나


눈앞으로 다가온 풍차


용서의 언덕에 도착하기까지 길고 긴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숨이 찼지만 멈추지 않고 걸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더 멀리, 더 넓게 보이는 풍경이 내게 힘을 주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용서의 언덕!


왜 용서의 언덕일까?


SEUL?! 서울?!


자전거 순례는 어떨까?

자전거를 타고 있는 순례자들을 보면 마냥 신기했다. 산을 오를 때도, 돌멩이로 가득한 내리막을 탈 때도 자전거로 지나가는 걸 보면 다들 허벅지 힘이 장난 아니구나 싶었다.


자전거로 순례길을 완주하려면 하루에 평균 70km를 달린다고 한다. 그래서 25~30km를 걷는 도보 순례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순례를 마칠 수 있다.


용서의 언덕에서 내려오다 본 표지판을 보고 자전거 길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 자전거로 지나가기엔 무리인 길이 많지.


어떤 순례자는 자전거로 오르막을 오르다 코가 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리막도 아닌 오르막에서? 얼마나 아플까.. 민지는 다음번엔 자전거를 타고 순례길에 올 거라고 했다. 다음에 또 온다는 것도 놀랐는데 자전거를 탈거라니 더 놀랐다. 생각만 해도 엉덩이와 허벅지가 저려온다.


길가에 핀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다 예쁘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바에 민지가 먼저 와 앉아있었다. 민지는 처음 보는 서양 남자와 함께였다. 영국에서 왔다는 그의 이름은 로버트. 참 잘생겼다.


레이나에 바로 전 마을에선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Ref Padres Reparadores. 숙박 5€.


   세시 십분 전, 오늘 묵을 숙소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답게 숙박비가 저렴했다. 침대를 배정받고 우리는 곧장 마을 어귀에 있는 강으로 갔다.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 오빠의 말에 발이라도 담그면 좋겠다 싶었는데, 웬걸 전혀 들어갈 수 없는 그런 강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저녁거리라도 사가자 했는데 일요일에 씨에스타라 문 연 가게도 없었다. 허탕의 연속이었다. 결국 빈손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빨리 씻고 쉬고 싶다.


오늘 저녁은 짜파게티와 특전식량

    저녁을 먹기 전에 지영이와 조금 차분한 대화를 나눴었다. 지금은 그 내용이 잘 기억나진 않는데, 아마 쉬어가도 좋다고 급할 거 없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처음부터 우리는 남들보다 훨씬 많은 기간을 잡고 출발했다. 그러니 어느 마을에서 며칠을 쉬어도 좋다. 다만 누구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음 했다. 나는 지영이와 함께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었다.


레이나는 골목이 참 매력적이다.




24.06.18 레이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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