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넷째 날, Pamplona
일어나자마자 전날 꺼내 둔 세면도구를 챙겨 세면대 앞에 섰다. 양치와 세수를 하고 일회용 렌즈를 뜯어 밤사이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진 눈에 올렸다. 으, 인공눈물 좀 넣고 낄걸.
아직 자고 있는 순례자들이 있어서 가방은 복도로 가져가서 챙겼다. 짐 싸는 게 익숙하지 않아 짐들을 복도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제 막 다섯 시 반을 넘겼는데 다른 방 순례자들도 하나둘 로비로 나왔다. 많이들 새벽에 출발하나 보다.
새벽 여섯 시, 우리는 수비리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 숙소 앞에서 요한 오빠는 중간 마을로 가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포장도로로 걷는 길, 산길로 걷는 길. 짧은 상의 끝에 우리는 도로를 걷기로 했다. 잠깐, 물이 없다. 숙소 근처에 문을 연 바가 있어 물을 한 병 구입했다. 물병이 꼭 술병 같이 생겼다.
론세를 떠날 땐 뒤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떠났는데, 수비리는 어쩐지 론세와는 달랐다. 아마 이곳을 다신 볼 수 없다는 걸 인지할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안녕, 쭈비리!
오늘은 발걸음이 참 가벼웠다. 가벼운 발걸음에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어느새 혼자 걷고 있었다. 오솔길을 걷고 있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내 주위에 있는 단순한 것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가방끈과 옷이 스치는 소리, 내딛을 때마다 들리는 흙 밟는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살랑이는 바람소리, 안정된 숨소리.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오직 걷는 데에만 집중했던 그 짧은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좁은 산길을 지나 숲으로 들어왔다. 저 앞에 곱슬머리의 서양 남자가 멀뚱히 서있는 게 보였다. 흐르는 냇물의 시원함에 잠시 이성을 잃은 걸까. 시원하게 노상방뇨를 하고 있었다. 숨어서 할 법도 한데 저렇게 내놓고 하기 있는지? 쯧. 한참 잘 걷다가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순례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 번은 나와 비슷하게 걷던 남자와 세 번째 눈인사를 나눴을 때, 더 이상 인사만 하긴 뻘쭘해서 먼저 말을 걸었다.
"넌 어디서 왔어?"
"스웨덴에서 왔어. 너는 한국에서 왔구나?"
"맞아. 어떻게 알았어?"
"네 가방에 있는 국기 봤지. 한국 어디에서 왔어?"
"나는 서울에서 왔어. 서울 알아?"
뻘쭘해서 시작한 대화는 서울에 놀러 와 보라는 심심한 권유로 끝이 났다. 나는 혼자 걷고 싶어서 다시 한번 그를 앞질러갔다.
30여분을 걷다 보니 카페가 나왔다. 카페 같은데 알베르게였다. 숙박하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는 건가? 푸드트럭에서만 쉬어봤지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슬쩍 둘러보다가 다른 순례자들도 쉬어 가길래 나도 자리를 잡았다.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바 겸 카페였다.
지영이와 오빠는 언제쯤 올까 기다리다가 먼저 주문을 하기로 했다. 혹시나 이곳에 들리지 않고 지나칠까 봐 주문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빼꼼 빼꼼 밖을 내다봤다.
콜라 한 잔이면 지금 이 상쾌함을 최고조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아까 만난 스웨덴 남자도 뒤이어 들어왔다. 콜라를 사고 밖으로 나와 그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었다. 파리에서 여행을 하고 왔다는 그에게 나도 파리를 여행하고 왔다고 했다.
남자는 나에게 파리에서 뭐가 가장 좋았냐고 물었다. 뭐가 가장 좋았냐고? 9kg 배낭을 메고 파리 중심부를 반나절 동안 정신없이 돌아다닌 게 다여서 무엇이 좋았는지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를 실제로 본 게 가장 신기하고 설렜었지. ㅎㅎ
10여분이 지나고 지영이와 오빠가 숲 속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요한 오빠는 처음 순례길을 걸었을 때 거의 매일 또르띠야를 먹었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했다.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또르띠야에 대한 기대가 컸다.
또르띠야(또띠야)는 스페인식 오믈렛이었다. 계란과 감자가 들어간 오믈렛인데, 내가 '또띠야'라고 알고 있던 얇게 펴진 밀가루 빵이 나오지는 않았다. 기대한 것만큼 새롭고 이색적인 요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계란과 감자면 다 맛있지 않은가. 빵과 함께 먹으니 더 맛이 좋았다.
마당을 뛰어다니던 고양이 한 마리가 테이블 근처로 왔다. 어슬렁어슬렁 우리를 살피던 고양이는 단번에 지영이 무릎으로 올라갔다. 지영이게 귀여움 받던 고양이는 이내 내 무릎으로 넘어왔다. 나는 고양이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내 몸에 올려본 적도 없다. 그걸 알리 없는 고양이는 내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더니 하품을 쩍 했다. 허벅지를 누르는 털 뭉치 같은 두 발에 힘이 꽤 들어가 있었다. 어찌할 줄 몰라서 당황했지만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아주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길이 나쁘진 않았는지 눈을 감고 편안해하는 것 같았다. 내 허벅지는 금세 뜨끈뜨끈해졌다.
갈림길이 나왔다. 어디로 가든 팜플로나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왼편에 보이는 산책로로 가기로 했다. 강을 따라 산책을 나온 마을 주민들이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평평한 아스팔트 길을 걸어서 발이 너무 무겁고 아팠다. 맨발로 걷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고 갈까 몇 번 고민하다가 슬리퍼로 갈아 신기로 했다. 가벼운 운동화를 챙겨 올 걸 그랬다. 생각보다 아스팔트를 걸을 일이 많네.
팜플로나는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가장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도시다. 지금까지 시골 마을만 봤었는데 이렇게 밀집된 건물들과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골목은 처음이어서 신이 났다.
알베르게를 둘러보고 오니 바욘 기차역에서 봤던 한국 여자가 지영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리손에서 일박을 한 거면 우리보다 하루 늦어서 다신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버스를 타고 론세스바예스를 건너뛰었다고 했다.
"오리손에서 론세 어땠어요?"
"정말.. 정말.. 힘들었어요."
우리의 대답을 들은 그는 버스 타길 잘했다는 안도감 짙은 웃음을 보였다.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하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순례자가 발목을 크게 다쳐 더 이상 걸으면 안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길 들었다. 안타까움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조심 또 조심.
골목마다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오랜만에 보는 거리의 활기찬 모습이었다. 우리는 버거킹에서 간단히 배를 채운 뒤 기념품 가게도 구경하고, 사람 구경도 했다. 그러다 수비리에서 봤던 중국인 부부를 다시 마주쳤는데, 이분들 정말 인싸들이시다. 정신없이 반가움을 표현하시고 정신없이 기념사진을 찍고는 갈길 가셨다. 이분들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난다.
오늘 저녁은 같은 알베르게에 있는 한국인들과 먹기로 했다. 출발할 때 사진을 부탁했던 남자, 피레네 산맥에서 만났던 홍콩 여자와 한국 여자, 수비리에서 같이 묵었던 분들 그리고 바욘에서부터 봤던 민지. 이곳에서 우리는 통성명을 하게 됐고 또 한 번의 한식 파티를 즐겼다.
22.06.18 팜플로나에서
다섯째 날, Pamplona
생각만큼 가뿐하지 않은 몸을 일으켜 뭉그적거리며 짐을 쌌다. 오늘따라 침낭이 말썽이었다. 최대한 압축해서 돌돌 말아 침낭 가방에 넣으면 되는데, 자꾸 삐져나오고 풀리고 엉망진창이었다. 입에서 욕이 나오려던 참에 요한 오빠가 팁을 알려줬다.
"그냥 구겨 넣으면 쉬워."
침낭의 폭신함이 죽을까 봐 구겨 넣기 망설이다가 결국 구기고 구겨 20초 만에 해결했다.
아무런 쓰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락앤락 통은 알베르게에 기부하고 우리는 8시, 퇴실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갔다.
다음 숙소의 입실 시간을 기다리면서 숙소 찾는 팁을 배웠다. 요한 오빠는 알베르게 정보가 정리된 어플을 이용하고 있었고, 민지는 순례길 책자를 구입해서 참고하고 있었다. 정보도 얻고 기념품도 될 것 같아서 나도 갖고 싶었다.
둘째 날 알베르게는 팜플로나 성당 바로 앞에 위치한 곳이었다. 파란색으로 꾸며진 숙소는 깔끔했다. 우리는 반지하 같은 공간을 배정받았는데,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았던 것 빼고는 침대, 화장실 모두 괜찮았다.
숙소에서부터 시청을 지나 쭉 걷다 보면 까스띠요 광장이 나온다. 천막 밑으로 플리마켓이 열려있어서 구경할 것들이 많았다.
친구들의 요청으로 쯔쯔가무시가 있을지도 모를 잔디밭에 앉아 포즈를 취해봤다.
젤라또도 사 먹고 스탠딩 바에서 맥주도 한잔씩 했다. 더운 날씨 탓에 술기운이 금방금방 올랐다. 이때 사진을 보면 주접이 따로 없다.
오늘 저녁은 마트에서 산 즉석식품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파스타 재료들과 조리된 빠에야를 사면서 선크림도 한통 샀다.
민지는 내일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 거라고 했다. 첫날 봐 둔 시청 근처 정육점으로 갔다. 많은 종류의 건조된 고기들이 걸려 있었다. 밖에서 봐도 신기했는데 들어와서 보니 더 신기했다. 시식도 권해주셔서 몇 점 먹어봤다.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한 번씩 꼭 듣는 질문은 '가톨릭 신자인가요?'다. 나는 '아니요.'라고 답한 뒤 '아닌 분들도 많이 걷더라고요.'라고 덧붙인다.
누군가에겐 종교적 신념을 품고 오는 길, 누군가에겐 일상의 일탈이 되는 길, 또 누군가에겐 오랜 인생의 쉼표가 되는 길.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일상의 일탈로 떠난 곳이 왜 하필 순례길이냐 묻는다면, 글쎄.
다른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지쳐있던 내게 이 여행은 아주 괜찮은 휴식처가 될 것 같았다. 산을 좋아하고 낯선 도전을 좋아하는 내가 멀리멀리 떠나고 싶어 할 때, 그때 이 여행이 해결책이 되어준 것이다.
종교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순례에 대한 이해와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길에서의 시간을 보낸다면, 순례자라는 이름으로 이 길을 걸어도 되지 않을까. 이곳을 찾는 수많은 이들의 수많은 이유들을 포용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면 용서의 언덕이라는 곳을 한 번쯤은 보게 된다. 침대에 누워 내일 루트를 검색하다 보니 용서의 언덕을 지난다는 걸 알게 됐다. 사진으로 봤을 때 진짜 멋있었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지 정말 궁금하다.
23.06.18 팜플로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