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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진 Jun 24. 2019

피레네, 내 관절에 피낼래

산티아고 순례길




둘째 날, Roncesvalles



    7시 45분, 안개 낀 생장을 뒤로하고 지영이와 나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첫걸음을 뗐다.



평일 오전의 생장은 여느 시골 마을처럼 조용하고 한적했다. 지저귀는 새소리, 바람에 실려오는 풀 향기,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선선한 온도. 어느새 개인 하늘은 파란 물감으로 물들인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주위는 온통 푸릇푸릇한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들떠있는 나의 기분만큼 무척이나 쾌청했다.


신났어~


여기저기 둘러보며 마을을 나서던 중 앞서가던 한국인 남자가 사진을 부탁했다. 급해 보이는 제스처에 나도 덩달아 급해져 최대한 빠르게 찍어줬다.


"이 정도면 괜찮으세요? 더 찍어드릴까요?"

"하나만 더 찍어주세요."


두어 번 더 핸드폰을 터치했다. 우리 또래의 그 남자는 감사 인사를 남기곤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도 저렇게 빨리 가야 하는 건가?


아직 마을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땀이 맺혔다. 시작부터 오르막일 줄이야. 시작부터 허벅지가 당길 줄이야.


사람들이 말하던 노란 화살표가 이런 거구나.

    순례길을 처음 알게 됐을 때 가장 궁금했던 건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지 였다. '노란색 화살표나 조개 모양의 그림을 따라가면 됩니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긴 거리를 표식 하나만 보고 걸을 수 있는 거지? 화살표를 놓치면? 화살표가 없는 곳은 없는 건가?


정말이지 없는 곳이 없었다. 표지판, 아스팔트 바닥, , 하다못해 돌과 나무까지. 표식을 남길  있는 모든 곳에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생각에 잠겨 걷거나 주변 경관에 홀려 걸을  문득 맞는 길로 가는 건지 확인을 해야  때가 온다. 그럴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노란색 화살표를 쉽게 확인할  었다.


마을을 지나 산길이 시작될 때쯤 서너 그루의 나무들 사이에 덜렁 세워져 있는 자판기 하나가 보였다. 그 생뚱맞음에 웃음이 났다. 작동은 하는 건가?


출발한 지 두 시간 정도 되었다. 뜨거워져가는 해가 정수리에 가까워질수록 내 허리는 점점 굽어져 갔고 고개는 바닥으로 더더 숙여졌다.


우리는 그늘이 보이면 무조건 그늘 밑으로 다녔다. 그늘만이 살길이었다. 한 번은 불타는 허벅지를 그늘 밑에서 달래고 있을 때 바욘에서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폴 파워!"


여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 폴을 살짝 건드렸다. 여자와 나는 같은 폴을 들고 있었다. 너도 데카트론에서 샀구나?


길고 긴 산맥들이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갈 마시고 있는 게 보였다. 작은 가게 앞에 식수대가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고 물을 먹어도 되는지 망설이고 있을 때 바욘에서 본 동양인 여자가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었다.


"이 물 마시면 돼요."


여자는 오늘 오리손에서 일박을 할 거라고 했다. 오리손에서 숙박이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왜 론세까지 안 가세요?"

"이렇게 오래 걷는 건 처음이라 무리하지 않으려고 오리손 예약했어요."

"와, 현명하시네요."


나도 모르게 입에서 '현명하시네요'가 나왔다. 나는 왜 몰랐을까, 숙박이 된다는 걸.


예약제로 운영되는 오리손 알베르게

10시 45분. 정확히 세 시간 만에 오리손에 도착했다. 안내받은 예상 소요 시간에 맞게 잘 걷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작은 휴게소인 줄 알았던 오리손은 50명 정도 인원을 받고 있는 산장이었다. 이곳에서 숙박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묵길 잘했다고 했다. 그중에는 생장에서 묵지 않고 오리손을 첫째 날로 잡고 오신 분도 계셨다.


바깥에 설치된 간이 화장실을 이용하고 다시 가방을 멨다. 나의 손에는 전날 미처 하지 못한 빨랫감과 네 개의 폴, 물이 있었고 지영이의 손에는 바욘에서 산 과자와 젤리가 들어있는 장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번갈아 든다고 들었는데 지영이가 훨씬 많은 길을 장바구니를 짊어진 채 걸었다. 물병은 각자 챙겨야 했고 손에는 아무것도 없이 걸었어야 했다. 그렇게 걸어도 힘든 길이었다.


    슬슬 배가 고파졌다. 아니 사실 너무 배가 고팠다. 몸이 힘들어서 배고픔을 잠시 잊고 있었다. 우리는 전날 저녁도 먹지 않았고 아침으로 먹은 시리얼은 소화된 지 오래였다. 오리손에서 무언갈 사 먹었어야 했다. 장바구니 속 짐짝이었던 과자와 젤리들이 어느새 소중한 식량이 되었다.


큰 나무 밑 그늘에서 걸음을 멈췄다. 장바구니 속 떡져있는 초콜릿 과자를 꺼내 급한 대로 당 보충을 하고 있을 때 간이 의자에 앉아있는 동양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언뜻 봐도 한국인인 그는 순례길이 두 번째라고 했다. 순례길을 한 번 이상 온다는 걸 생각해보지 않아서 나는 조금 놀랐다. 이 길이 얼마큼 의미 있었길래 다시 찾아온 거지?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자를 나눠먹었다.


초반보다 오르내리는 길이 많아졌다. 길이 넓은 덕에 힘들 때마다 널브러져 앉아 쉬어갔다.


눈 마주쳤어.


드넓게 펼쳐진 갈림길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물을 것 같다.


표지판 주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쉬고 있길래 우리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마침 구름이 그늘을 만들어줘서 쉬어가기 딱 좋았다. 아까 만났던 한국 남자도 이곳에서 쉬고 있었다. 그는 3년 전 이 근방에 푸드트럭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늘은 영업을 안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푸드트럭만 있었더라면. 이렇게 굶주려가며 서럽게 걸어가진 않았을 텐데. 론세까지 10km, 정말 목마르고 배고팠다.


이후로도 수차례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걸었다. 사실 한 시간 전부터 물이 부족했다. 식수대도 보이지 않아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동이 난 물통을 들고, 푸드트럭 이야기를 들은 곳에서부터 30분을 더 걸어서야 식수대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린 이 30분을 '야고보 체험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잠시나마 지팡이 하나만 짚고 순례길을 걸었던 야고보가 된 것 같았다.

잠깐만 어쩌면 그는 물 정도는 상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계곡물 마셨으려나..


고도 1275m 식수대

목을 축이고 세수도 한번 하고 나니 정말 살 것 같았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취해있을 때 옆구리에 끼고 있던 폴이 무언갈 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놀라 뒤돌아보니 우리 또래 여자가 괜찮다는 표정을 지은 채 서있었다. 그는 한국인 여자와 걷고 있는 홍콩 사람이었다. 사과와 함께 인사를 나눴다.


다시 가방을 메고 출발하려 할 때 식수대 옆 비석에 새겨진 'NAVARRA'가 눈에 들어왔다. 나바라가 대체 뭐지? 여기 올 때도 몇 번 봤던 것 같은데.

비석 앞에서 '나바라 운나나~'이런 싱거운 소리를 하며 그들과 우린 잠시 웃음꽃을 피웠다.


'Navarra'는 스페인의 주 중 하나이다.


16시, 구름 밑에 있으면 시원하고 구름이 사라지면 해가 쨍쨍하다.


한국 남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게 되면서 통성명을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눴다. 마지막 관문인 건지 돌길로 된 오르막이 꽤 험했는데, 허벅지 터지는 거 붙잡으며 대화를 나눴던 게 기억난다.


오르막을 다 오르고 나면 숲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동네 뒷산 둘레길을 걷는 것 같아서 좋았다. 나는 남자에게 얼마나 더 가면 되는지 물었다. 그는 성인 걸음으로 보통 1시간에 4km를 걷는 다며 이제 몇 분 정도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그때 처음 1시간에 얼마큼 갈 수 있는지 계산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얼마큼 갈 수 있을까?


둘레길도 잠시, 곧 미친듯한 내리막길이 나왔다. 경사를 보고 있자니 몇 년 전 비바람 몰아치는 날 하산했던 한라산 성판악이 내 뇌리를 스쳐갔다. 방심하면 무릎 나갈까 봐 최대한 조심히 내려갔다. 저 뒤에서 홍콩 여자의 비명소리와 한국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없을 정도로 긴 내리막이 끝나고 드디어, 드디어 산행의 끝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났다. 론세까지 0.5km! 저 울타리를 넘어가면 오늘 일정은 끝이 난다.


울타리 두 번!


18시 15분,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위해 5분 정도 대기했고, 아까 만났던 한국인, 홍콩인 여자와 같은 공간을 배정받았다. 알베르게는 이층 침대 두 개로 4인이 한 공간을 배정받는 방식이었다. 숙박비는 12유로였고 우리는 10유로를 추가하여 순례자 식사도 함께 예약했다.


숙소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샤워실과 화장실도 널찍하고 쾌적했다. 침대 맡에는 개인 사물함도 있었다. 듣기로 최근에 리모델링을 했다고 한다.


    오늘 걸었던 길이 순례길 중 가장 힘든 코스라고 한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걸쳐진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는, 예상 시간만 일곱 시간인 코스였다.


지영이와 나는 동네 뒷산에서 가끔씩 체력 단련을 하던 등산 메이트다. 도전과 모험을 좋아하는 우리는 한라산과 지리산도 올랐었다.

처음 마음먹고 올라본 산은 한라산이었다. 6월의 폭염주의보를 뚫고 남들보다 두 배의 시간을 걸어 백록담에 도착했다. 지리산도 비슷했다. 심지어 두 번째 지리산에선 뜻하지 않게 야간 산행이 되어 예약한 대피소 직원께서 우리를 찾으러 오시는 해프닝도 있었다. 캄캄한 산속에서 본 광양 제철소가 참 장관이었는데..


우리는 몇 번의 시행착오에서 얻어낸 교훈으로 이번 순례길은 시간은 물론 기간까지 남들보다 1.5배는 더 잡자고 했다. 그런데 첫날 예상시간이 7시간이라니! 그럼 10.5시간 동안 걸어야 하는 건가? 이건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그전에는 도착하겠지. 이 생각으로 출발했는데, 너무나도 정확하게 10시간이 걸렸다.


순례길 첫 저녁식사!

저녁 식사를 위해 숙소 옆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산 속이라 그런지 바깥공기가 꽤나 쌀쌀했다.

우리가 예약한 순례자 식사는 '와인-전식-본식-후식'이 제공되는 코스 요리이다. 일반 레스토랑에서의 '메뉴 델 디아'라는 스페인식 '오늘의 메뉴'가 순례길에선 'Peregrino(순례자)'가 추가되어 순례자들을 위한 와인이 함께 제공된다.


    우리는 한국 남자와 함께 4인석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남자는 정말 맛있는 맥주가 있다며 한 잔 사주고 싶다고 했다. 환타와 맥주를 섞은 오렌지맛 맥주였는데 달달한 게 맛있었다. 술이 들어가면 더 피곤해질 것 같아 거절했었는데 안 먹었음 아쉬울 뻔했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남자로부터 길에 대한 자세한 팁을 들을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어느 정도 알아보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남자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들은 처음 듣는 내용이 많았다.


4인석 중 한 사람은 중년의 스페인 남자였다. 이름은 후안 까를로스. 일주일 동안 부르고스까지 걷는다고 했다. 그는 우리와 영어로 대화를 하려 했는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번역기를 켰다. 스페인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스페인어로 번역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지영이와 남자는 스페인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기초 스페인어 책에서 습득한 'El Agua'를 자랑해보았다. 발음이 좋다며 칭찬해주셨다. 껄껄

먼저 식사를 마친 까를로스는 우리에게 브라우니를 사주고 자리를 떠났다. 그에게도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시간은 벌써 열 시를 넘기고 발바닥에서 슬슬 통증이 올라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닌 것이 여기저기서 어기적 거리는 걸음새가 많이 보였다.


침대로 돌아와 짐 정리를 하면서 한국 여자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순례길을 걸으러 왔다고 했다. 홍콩 여자와 같이 걸으러 온 거냐고 물었더니 길에서 만난, 오늘 처음 보는 사이라고 했다. 당연히 같이 온 친구라고 생각했을 만큼 둘은 정말 친해 보였다. 유머 코드가 잘 맞는 것 같았다.


홍콩 여자는 한드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한국어를 꽤 하는 것 같았다. 한국 여자에게 한국말로 하는 질문을 옆에 있던 홍콩 여자가 대답하곤 했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한바탕 깔깔대며 웃었다.


뜻밖의 요가 타임

    침대에 눕고 나니 발바닥이며 허리며 어깨며 온몸이 쑤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은 못 걸을 것 같다. 몇 시에 일어나야 하지? 몇 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내일 숙소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 너어무 피곤하다.




20.06.18 론세스바예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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