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진 Jun 19. 2019

파리에서 바욘, 바욘에서 생장

산티아고 순례길




첫째 날, Saint Jean Pied de Port



    파리에서의 짧은 관광을 마치고 10시간을 달려 바욘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너무나도 상쾌한 풀 내음과 향기로운 꽃냄새가 내 코를 스쳤다. 어디서 오는 향기인가 찾아보니 근처에 식물원이 있었다. 10시간 전 베흑씨 정류장에서 맡았던 찌린내와 버스 시트의 꿉꿉함이 단번에 정화되는 순간이었다.


지영이와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바깥공기를 쐬다가 데카트론에 가기 위해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플릭스 버스정류장은 식물원 근처 관광안내소다. 관광안내소 건너편으로 넘어 가면 데카트론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데카트론에서 사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침낭이었다. 배낭 안에 수납할 수 있는 경량 침낭을 보러 갔는데, 한국에서 살 걸 그랬다. 한국에서 본 제품과 가격 차이가 꽤 있었다. 1-2만 원도 아쉬운 상황이어서 흠칫했지만 침낭은 꼭 필요했으므로 구매를 했다.


내가 순례길에 잡은 예산은 100만 원이었다. 이마저도 아끼고 아끼면 90만 원까지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90만 원의 근거는 숙박비가 5-8유로라는 블로그의 글을 보고 잡은 것인데 꽤나.. 오래전 글을 봤던 것 같다.

나는 생장에서부터 산티아고 도착  32 동안 하루 평균 30유로를 썼다. 숙박비로 평균 9유로를 썼고, 식비에는 17유로,   교통비, 의약품, 필요한 물품 등에 썼다.


쇼핑을 마치니 너무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기내식 이후로 끼니를 챙겨 먹은 건 전날 점심으로 먹은 맥도날드가 전부였다. 근처에 대형 마트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대형 마트라면 푸드코트 정돈 있겠지.

5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마트는 생각보다 크고 깔끔했다. 무료 와이파이와 깨끗한 화장실을 쓸 수 있었고 초밥 코너에 있는 초밥도 정말 맛있었다. 아마 갓 만든 초밥인 것 같았다. 굶주려있던 우리에게 축복 같은 한 끼였다.


마트 뒷문 주차장으로 나오면 A1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이 나온다. 버스에서 1유로를 지불했고, 바욘 기차역까지는 20분 정도 걸렸다.


바욘 기차역


기차 탑승까지 두 시간의 여유가 있는 걸 확인하고 대합실에서 대기했다. 대합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큰 개를 데려온 사람도 있었고 혼자 온 듯한 우리 또래 동양인도 있었다. 한국인일까 말 걸어 보려다가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불편해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가만히 있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어느 나라 사람일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생장에 가냐고. 그렇다고 했더니 자신은 순례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곤 가방에서 크레덴샬을 꺼내 앞뒤로 빼곡히 찍힌 세요들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셨다. 크레덴샬을 보고 나니 그분의 흙먼지 끼인 등산화와 닳아있는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기차를 기다리는 거냐고 물었다. 위아래로 세차게 고개를 흔드는 날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기차는 지금 운행을 안 할 거야. 너희들 버스를 타야 해."


바욘에서 생장으로 가는 버스 10.10€

그때부터 우왕좌왕 주위를 바삐 살폈다. 매표소 창구로 간 할아버지는 직원에게 무언갈 설명했다. 버스를 타야 하는 게 맞았다. 버스표도 버스에서 계산하면 되는 줄 알고 밖에서 기다리다가 주위 사람들이 티켓을 들고 있는 걸 보고 나서야 기계에서 사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버스가 어느 지점에서 정차하는지, 버스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공유해주셨다. 도움받고 있는 우리를 본 다른 순례자들도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몇 분 뒤 버스는 할아버지가 일러준 곳에 정차했고 우리는 첫 번째로 짐을 실을 수 있었다. 친절한 할아버지 잘 계실까? 할아버지는 왜 순례길을 걸으셨을까? 좀 더 대화해볼 걸 그랬다.


    한 시간 정도 프랑스 시골길을 달리고 나면 순례길의 시작인 생장에 도착한다. 우리가 걷기로 한 프랑스길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Saint-Jean-Pied-de-Port에서 시작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북쪽길, 프랑스길, 포르투갈길 등 다양한 길이 있고, 그 길의 시작점도 다양하다. 생장이든 팜플로나든 레온이든 어디서 시작하든 산티아고로 향한다면 그 길이 순례길이 된다. 따라서 반드시 생장이 시작점일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시작점일 뿐이다.


버스에서 가방을 찾고 곧장 순례자 사무소를 향해 걸었다. 순례자 사무소는 구글 지도로 찾아가도 되지만 자세한 위치를 몰라도 우르르 걸어가는 순례자들을 따라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사무소까진 10분 정도 걸렸다.


순례자 사무소

    순례길을 걷기 전 순례자들은 순례자 등록이라는 간단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사무소에 들어서면 언어별로 앉아있는 직원들을 볼 수 있는데, 이때 순서를 기다렸다가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담당자에게 차례대로 가면 된다.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이 있는데 한국어는 보지 못했다.


내가 만난 직원분은 중년 여성분이셨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여권에 적힌 인적사항을 보여주면 크레덴샬과 서너 장의 안내서를 받게 된다.


크레덴샬은 순례길 위의 여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순례자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머물거나 지나치는 마을의 숙소, 카페, 성당 등에서 '세요(sello)'라는 도장을 크레덴샬에 찍어야 하는데, 세요가 찍힌 크레덴샬이 순례자의 여정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순례길을 기념하는 기념품이 되기도 한다. 참고로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할 땐 반드시 여권과 함께 크레덴샬을 보여줘야 한다. 만약 중간에 크레덴샬을 분실하거나 추가 발급이 필요할 경우 대도시 공립 알베르게에서 발급받을 수 있다. 생장 순례자 사무소에선 발급 비용으로 2유로가 필요했다.


안내서를 받고 나면 프랑스길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과 함께 내일 걷게 될 길을 짚어주신다. 산맥을 넘으면서 27km를 걸어야 한다고, 제일 힘든 구간이라고 하는데 그다지 실감 나진 않았다. 얼마 큼의 체력이 필요한지 아무런 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감도 없었기에,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었기에 그저 이 모든 게 신기하고 설레기만 했다.


프랑스길 알베르게 정보, 고도 안내서, 크레덴샬 그리고 롱세스바예스까지의 한국어 안내서. 조개 껍데기는 기부제로 운영된다.


순례길 첫 알베르게

    사무소에서 순례자 등록을 마치고 이젠 숙소를 잡아야 했다. 꽤 늦은 시간이라 남아있는 숙소가 없을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사무소 직원분께서도 걱정이 되셨는지 자리가 남아있을 것 같은 숙소 몇 개를 추천해주셨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한국인 남자와 숙소에 대해 한두 마디 나누고 직원분께서 일러주신 숙소를 찾아갔다.


빈자리가 없었다. 지나가던 부녀의 추천으로 들려본 숙소도 빈자리가 없었다. 곤란한 차에 한 숙소 주인의 호객 행위를 보고 일단 들어갔다. 왜 여긴 방이 남아있지? 비싼가? 싶어서 경계했는데 조식 포함 22유로였다. 앞으로 다닐 사설 알베르게에 비해 비싼 가격이지만 이곳 생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숙소 내부는 엔틱하게 꾸며져 있었고 깔끔했으며 우리가 머물 방은 널찍했다. 사람도 네 명뿐이어서 편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


네 명 중 한 명은 사무소에서 봤던 또 다른 한국인 남자였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천주교 신자이며 툴루즈라는 곳을 들렸다가 생장으로 왔다고 했다. 툴루즈에 대해 처음 들어본 나는 툴루즈도 순례길의 일부이고 성모 발현 성지라고 알려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짐을 풀고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저녁 9시 무렵이었지만 주위는 너무나 밝고 환했다. 달은 벌써 저만치 떴는데 이렇게나 밝다니! 해 질 녘 쏟아지는 빛 아래서 둘러본 생장은 내게 벅찬 두근거림과 함께 묘한 포근함까지 느끼게 해 주었다.



30분 정도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고단한 몸을 씻어 녹였다. 파리에서 바욘, 바욘에서 생장. 고된 일정에 우리는 저녁 먹을 생각도 없이 침대에 누웠다. 오직 내일만을 상상하며 잠든 첫째 날이었다.




19.06.18 생장에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