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부잣집의 맏딸, 우리 큰 이모는
경산의 말 그대로 깡시골, 복숭아 농사를 짓는 집에 시집갔다.
그리고 큰 이모부, 외갓집 사위들 중 첫 번째 사위였던 그는
건강했고, 성실했고, 일도 잘했고,
어릴 적 내 눈엔 꽤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처녀 시절 종종 큰 이모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엄마와 큰 이모는 두 살 터울, 친구처럼 자란 사이였다.
그 언니가 시집을 가버리니, 엄마는 허전했을 거다.
그때마다 이모부는 엄마를 반기며 참 예뻐했다고 한다.
엄마와 큰 이모는 웃을 때 찡그리는 얼굴,
코 옆으로 생기는 주름, 생김새와 분위기까지 꼭 닮아 있었다.
그래서 나도 엄마 없이 큰 이모랑 있을 땐
무의식적으로 “엄마”라고 부르곤 했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이모부는 엄마를 ‘큰 처제’라 부르며 정을 많이 줬고,
엄마도 “형부, 형부” 하며 살가운 정을 나눴다고 한다.
보기 드문, 따뜻한 형부와 처제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이모부에게 일이 생겼다.
술을 드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또랑을 지나는 좁고 높은 다리에서 떨어진 것이다.
그 사고로 큰 이모부는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고,
그날 이후 휠체어에 앉아 평생을 살아야 했다.
여름방학이면 우리는 큰 이모네 집에 놀러 가곤 했다.
복숭아 철이면 도와드릴 겸, 휴가 삼아 외갓집 식구들이 한데 모였다.
밭에서 복숭아를 따고, 해 지면 이모의 넓은 시골집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아이들은 잠자리와 개구리를 쫓아 뛰어다녔다.
그럴 때면 엄마가 말하곤 했다.
“이모부 심심하실 텐데, 들어가서 말동무도 좀 해드려라.”
솔직히 밖에서 뛰어노는 게 더 좋았다.
잠자리채 들고,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면서 돌아다니는 그 시간이
어린 나에겐 더 재미있고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엄마 말이니까,
어느 순간이 되면 꼭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이모부는 휠체어에 앉아 조용히 TV를 보고 계셨고,
나는 이불 위에 앉아 이모부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모부~ 잠자리 세 마리랑 매미 두 마리나 잡았어요.”
그러면 이모부는 잠시 미소를 짓다가,
늘 울먹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래 돼갖고… 아무것도 못 해줘서 미안하다.”
그 눈빛이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
시골이라는 환경,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TV만 보는 일상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무력감이 쌓여 만들어낸 조용한 우울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아빠가 돌아가셨다.
엄마가 남편을 잃은 그날,
이모부는 장례식장에 오지 못한 채,
집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이래 돼갖고… 집안 맏사위인데…
처제한테 가보도 몬하고…”
그 말만 중얼중얼 반복하셨다고 했다.
사실 이모부가 건강하셨더라도
실질적으로 엄마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모부는 엄마를 참 예뻐했고,
자기 아내를 꼭 닮은 처제의 아이들인 우리를 볼 때면
그 감정이 더 깊어졌던 것 같다.
지켜주고 싶지만 지켜줄 수 없다는,
무력함과 미안함이 늘 이모부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 무력함 속에서도 우리를 보면 늘 웃어줬다.
손을 잡아주고, 미안하다고 말했고,
엄마 생각이 날 때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그때의 따뜻한 손의 온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 손이 전하던 말.
“내가 이래 돼갖고… 미안하다.”
그건 체념이었고, 연민이었고,
그리고 분명 사랑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방식의 애정이었다.
그 사람은
너무나 사랑했던 자기 아내와 꼭 빼닮은 큰 처제를,
그리고 큰 처제를 닮은 우리를
조용히,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의 따뜻한 눈빛과 말없이 전한 마음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