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지연 서예원

by 하린

우리 동네 새마을금고 2층에 서예원이 하나 생겼다.

’ 지연 서예원‘

젊은 예술가 부부가 운영하는 서예원이었는데, 어느 날 엄마는 나와 서준이를 데리고 상담을 받더니 그곳에 등록시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참 현명했다.


“너거가 성질이 사납고, 말썽도 많이 피우니까

심성 좀 고와지고…

나중에 늙어서는 옛날 생각하면서

붓이라도 잡고 마음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고 보낸 거다.”


하지만 그 시절, 아빠는 서예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서예원을 와 보내노? 거,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마라이.”


엄마는 아빠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았다.


나는 아빠를 닮아서 손재주가 나쁘지 않았다.

글씨를 곧잘 썼다. 예쁘게.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는

학교 백일장 서예 부문에서 늘 최우수상을 탔다.


상장을 받아오면

아빠의 불만도 좀 사그라들었지만,

정작 나는 서예가 하나도 재미없었다.


팔은 아프고,

먹은 늘 갈아야 했고,

먹 가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결과물은 예뻤다.

서준이는 악필 중의 악필이어서

내 글씨와 비교가 확 났다.


10장 중 가장 잘 쓴 걸 걸어두는데,

내 글씨는 서준이 것보다 언제나 ‘어른 글씨’처럼 보였다.

그게 좋아서,

그거 보는 맛에 위안 삼아 다녔다.

억지로, 억지로.


서예원 1층은 새마을금고였는데,

늘 우리 남매와 같은 시간에 나오시던

은행장 할아버지가 정말 멋있었다.


위엄 있고, 인자하고, 여유가 넘쳐 보였고,

무엇보다 글씨를 너무 멋지게 쓰셨다.

그 시절의 나는

그분이 써 내려가는 글씨를 보며

처음으로 ‘멋’이라는 걸 배웠다.


몇 년 전,

그 시절이 생각나서 서예를 다시 해볼까 싶어

학원에 등록했는데…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요즘은 궁서체보다는 캘리그래피가 대세였고,

내 안에 남아 있던 서예의 감각은

그 스타일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아, 옛날 같지가 않더라.

글씨도, 손맛도, 마음도.


그냥, 그때는 그랬던 거다.

하기 싫은 것도 억지로 하다 보면

기억은 남고,

추억이 되는 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그때 정말 잘 쓰긴 했던 걸까?

아니면…

그때 유일하게 나한테 붙었던 ‘칭찬’이어서

자꾸 그 시절을 예쁘게 기억하려는 걸까?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때 그 글씨체처럼…

조금은 번지고,

조금은 번복되는

기억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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