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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Jul 17. 2024

우중雨中 러닝

런중일기 5. 비 오는 날 넘어지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비가 올 때의 야외 러닝은 추천하지 않는다. 러닝화가 젖었다 마르면 변형이 오기 쉽고, 체온 관리도 어려울뿐더러, 평소보다 발이 더 붓고, 바닥이 젖어 있어서 부상의 위험이 높다. 빗길에 미끄러져 다칠 수도 있지만, 물웅덩이를 피하려고 발을 요리조리 옮기다 보면 근육이나 관절에 무리가 가서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 동안 근육통이 지속될 수 있다. 통증이 있는 동안은 달리기를 쉬는 것이 좋으니 비 오는 하루 무리해서 달리다가 몇 주를 달리지 못하게 될 수 있으니 비 오는 날의 달리기를 추천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경우 평소에 외출을 즐기지 않지만, 러닝복을 입고 비를 맞는 것은 좋아하는 편이다. 러닝복은 물에 젖어도 그리 무겁지 않고 젖어도 빨리 마르니 비 맞기가 두렵지 않다. 다만 러닝화가 젖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비가 올 때 달리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다. 게다가 내가 주로 달리는 길에는 집이 물에 차 피신을 나온 지렁이가 많아서 발을 내딛기가 무섭다. 지렁이가 죽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밟을 때의 느낌을 상상하면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의 나의 달리기는 우산을 쓰고 나가 걸으며 지렁이 구조대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주된 작업이 된다. 


비가 올 때는 하늘의 기운을 잘 살펴서 빗줄기가 멈추거나 잦아든 순간을 찾아서 우산을 가지고 나간다. 신발은 아끼는 러닝화보다는 일반 운동화를 고른다. 그렇게 우산을 들고 걷다가 빗줄기가 굵어지면 우산을 펼치고 조금 더 걷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주로 택한다. 


그날도 비가 왔다. 하루 종일 내릴 것 같더니 오후가 되자 잠잠해졌다. 주로 저녁 전이나 저녁을 먹고 난 후에 운동하니 적절한 시간이었다. 나갔다가 비가 오면 집으로 오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장우산을 챙겼다. 비가 온 뒤라 공기가 상쾌했다. 너무 신나서 일까? 한강으로 나가는 나들목 지하도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왼발이 왼쪽으로 미끄러지며 왼 무릎으로 바닥을 쿵 하고 찍었다. 순간 오른손을 뒤로 뻗어 바닥을 짚었다. 크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 내 뒤에 따라오던 50대 아저씨가 "괜찮아요?" 하고 소리치며 물었다. 아저씨는 나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걱정하는 이름 모를 아저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네, 괜찮아요." 라고 대답하며 서둘러 일어섰다. 좀 더 앉아서 몸의 상태를 체크하고 싶었지만, 길바닥에 앉아있으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걱정시킬 수 있으므로 내 몸을 응원하며 어서 일어났다. 아저씨는 괜찮은지 재차 물었다. 왼쪽 무릎과 정강이, 오른 손바닥이 조금 아팠지만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마 크게 넘어져서 기절이라도 했다면 아저씨가 구급차를 불러주셨을 것 같은 참견이라 안심이 되었다. 


나들목을 빠져나와 바로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아저씨는 나들목에서 오른쪽 길에 산책을 하러 나서면서 뒤돌아보며 내가 괜찮은지 한 번 더 살펴주셨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아저씨가 저만치 멀어져 가는 걸 보고 여기저기 몸을 살폈다. 흙이 묻은 자리, 얼룩이 진 자리를 털고 멍이 들 기세로 벌겋게 부어오른 무릎을 보았다. 욱신 거리긴 하지만, 무릎을 접었다 폈다 하며 상태를 체크해 보니 좀 괜찮은 것 같았다. 근육이 다 사라진 몸이지만 별로 다치지 않은 내 몸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손바닥의 통증을 빠르게 사라졌다. 달려도 되겠는걸? 걷다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모자를 쓰고, 바람막이를 입으니 비가 오는 지도 몰랐다. 무릎도 괜찮은 것 같아서 살짝 뛰기도 했다. 우산을 드는 손을 바꿔가며 뛰기 좋은 자세를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강 하류로 향하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바람에 젖어 풀들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이 생각났다. 그도 이런 풍경을 보며 시를 썼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가니 아까시 나무가 꺾일 듯이 자전거길을 향해 축 처져 있었다. 물에 젖은 꽃잎 때문이려나. 비가 그치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풀도, 나무도 하늘을 향해 뻗어갈 테지. 비 오는 날 넘어지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풀도 넘어지고, 나무도 넘어지고 그러는 게 비 오는 날의 그림이다.


가양대교에 다다르니 다리 아래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비를 피해 족발을 먹는 청년들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은 이런 구경도 할 수가 있구나. 다리에 고인 물이 한강으로 떨어지며 여느 때와는 다른 동심원을 그렸다. 비 오는 날에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드물지만, 우산을 쓰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도 빗속을 뚫고 뛰는 사람과 우산을 쓰고 유유자적 걷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젖은 땅 위에 죽은 지렁이가 보인다. 하나, 둘, 셋. 죽은 지렁이가 열 마리가 넘자 수를 세는 것을 그만뒀다. 어쩌다 살아있는 멀쩡한 지렁이를 발견하고는 풀숲으로 옮겨주었다. 하나는 구했다. 만족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다친 무릎이 더 붓고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이 정도 넘어지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가끔 이 정도는 넘어지면서 멍을 가지고 싶다고, 뼈에 실금이 가거나 부러지는 것보다 멍드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오래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상처도 그런 단계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비 오는 저녁이었다.


2024년 5월 6일 월요일에 발견한 이야기.

※ 밀리로드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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