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 Jul 10. 2024

지렁이 구조대의 기쁨과 슬픔

런중일기 4. 토룡이는 박씨를 물고 올 것인가

※ 참고: 지렁이 사진 없음.


지렁이에 대한 긍정적인 정서가 생기게 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하지만… 하나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림 한 점이다. 운동화를 신은 커다란 발이 막 흙바닥을 밟고 뗀 상황을 그린 그림이었다. 흙바닥에는 신발 밑창의 무늬가 그대로 남아있고 한 발자국만큼의 공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개미와 지네 같은 벌레가 있었고, 그리고 지렁이 한 마리가 가장 큰 공간을 차지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지렁이에게 받은 첫인상이었다. 인간의 무게가 닿지 않은 곳에만 살 수 있는 수많은 생명들. 어린이였던 나는 인간은 수많은 생명을 밟으며 살아간다고 느꼈다.


두 번째 계기는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을 보게 된 이후였다. 브래드 피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는 달라이 라마와 주인공의 우정을 보여준다. 나에게는 중국의 침략으로 인한 티베트의 고통을 보여주는 영화로 남아있다. 이 영화에서 지렁이가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티베트에서는 집을 새로 지을 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 집터를 닦을 때 흙 속에 생물들이 누군가의 환생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흙 속의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기 위해 지렁이며 벌레를 다 솎아낸 다음에 기초 공사를 하니 집 하나 짓는데도 한 세월이 걸렸다. 집터의 흙을 고르는 사람 두 손에 지렁이가 소중하게 담겨 있는 장면이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 있다. <티벳에서의 7년>이 1997년 영화이니 그때 이미 나는 지렁이에 대한 애정이 생겼나 보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지렁이를 구하러 다니지는 않았다. 산책을 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비 오는 날이나 비가 온 뒤에는 젖은 흙이 신발에 묻는 것이 싫어서 한 번씩 오르는 산도 가지 않았다.



한강 근처 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내가 보는 지렁이는 죽은 지렁이들 뿐이었다. 말라죽거나 밟혀 죽거나. 항상 이 두 가지 상태의 지렁이가 내가 주로 보는 지렁이였다. 걷기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것을 선호했던 까닭에 불광천을 오고 가면서도 지렁이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공원을 산책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렁이를 구할 일이 종종 생기는 것이었다.


물론, 맨손으로 지렁이를 휙 잡아서 던지지는 못한다. 아스팔트로 닦아놓은 산책길을 가로질러 흙을 찾는 지렁이를 보면 먼저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찾아서 지렁이 몸 한가운데 넣어 들면 지렁이는 대부분 머리와 꼬리가 만나는 폴더 상태가 된다. 그대로 올려서 개미가 없는 흙이 있는 곳에 올려주는 것으로 구조대의 업무는 끝난다. 지렁이를 좋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지렁이를 손으로 잡는 것을 꿈도 못 꾸고, 실수로 밟았다 치면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게다가 나의 짝꿍은 나의 지렁이 구조대 일을 정말로 경악하면서 싫어한다.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지렁이 구조대를 자초하는 것은 일종의 환경보호의 차원에서랄까. 1) 지렁이는 흙을 비옥하게 한다. 2) 지렁이를 살리면 흙이 비옥해진다. 3) 비옥한 흙에서는 식물이 더 잘 자란다. 4) 식물은 광합성을 한다. 5) 산소가 많아진다. 6) 기후온난화의 해결? (물론, 말이 안 된다) 이런 계산법으로 지렁이의 능력치를 상향 평가하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일까?


게다가 이 일은 평소에 뛰고, 걷는 것도 어찌나 피곤하게 하는지 모른다. 지렁이를 신경 쓰는 통에 정면을 봐야 할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가서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은 예삿일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나는 몇 백 개의 나뭇가지를 지렁이로 오해했던가. 


어차피 내가 구하는 지렁이보다 죽는 지렁이가 더 많을 것이다. 하루는 한 시간 동안 공원의 끝과 끝을 오가며 스무 마리 정도의 지렁이를 살려 보내고, 길을 되돌아오는데 흙 위로 돌려보냈던 지렁이들이 꿈틀대며 아스팔트로 다시 기어 나오는 것을 보며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티스푼으로 모래를 옮겨 해수욕장을 만드는 일처럼 쓸모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음 비가 오기 전까지 지렁이의 한 마리의 생이 연장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참고로 지렁이 구조대 활동은 자존감이 바닥 쳤을 때 자기 효능감 상승에 미미한 도움을 준다.


어쨌든 비가 내린 다음날 러닝을 나갈 때면 적당한 나뭇가지 두 개를 골라 허리 가방에 끼워두고 뛰다가 걷다가 서서 쪼그려 앉기를 반복하며, 나뭇가지를 갖다 대면 몸부림치는 지렁이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지렁이를 옮기는 일을 자초할 것 같다. 혹시 언젠가 내가 구한 토룡이 승천하며 꿈속에서 소원이라도 들어주려나.


2024년 4월 15일 월요일에 발견한 이야기.

※ 밀리로드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이전 03화 배경음악과 함께 하는 인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