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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Jun 26. 2024

꽃을 기다리는 일

런중일기 2. 꽃 마중

2023년 봄, 서울식물원에 튤립 구경을 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내 뒤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른 여자 일행 둘에게 “꽃 사진 찍으면 늙은 거야.”라고 말하며 지나갔다. 이 말을 던진 여자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여자는 머쓱해하며 ‘들었나 봐.’하는 표정으로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나를 지나쳐갔다. 빨간 튤립이 모여서 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이 미학적으로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은 거라고 어떻게든 속으로 변명을 해보지만, 그 여자 말이 맞다. 


나는 그들보다 늙었다.


내가 이십 대일 적에는 꽃 사진을 일부러 찍으려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올해 초에는 어떤 할머니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유튜브에서 본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꽃 사진을 찍는 이유는 앞으로 그 꽃을 볼 날이 몇 번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 시기에 가까워지는가. 지금보다 좀 더 젊었을 때는 그저 꽃을 보는 것만 흐뭇해했지, 꽃을 굳이 사진첩에 담지는 않았다. 지금 내 사진첩에는 우리 집 고양이 사진과 꽃, 나무, 하늘, 달 같은 사진들로 넘쳐난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곡선과 반복되는 무늬를 좋아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 여자와 할머니의 말처럼 ‘늙었기도 하고, 앞으로 꽃을 볼 날이 더 적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잠깐 ‘젊음’과 ‘늙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다가... 


그렇다면!!!


나의 이번 봄부터의 계획은 꽃을 더 잘 찾아보기로 하면 어떨까 했다. 작년에 미리 봐뒀던 꽃나무와 들꽃들을 위치를 체크하고 동네의 이곳과 저곳을 걸으며, 달리며 꽃의 개화와 낙화 상황을 체크한다면!


집 앞에는 백매화와 홍매화, 산수유가 한 그루씩 심어져 있다. 집에서 50미터만 걸어나가면 개나리가 피는 골목길이 있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벚꽃나무 다섯 그루가 심어진 도로가 나온다. 맛있는 동네 빵집 근처 오피스텔 앞에도 작은 산수유가 심어져 있다. 작은 산수유나무를 보러 가는 길에는 여기저기 철쭉이 자리한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오래된 맨션은 화분을 정원처럼 가꾸는 사람이 있어 계절마다 색색의 꽃들이 골목을 화사하게 만들어준다. 그 집에서 발견한 꽃들만 해도 스무 종이 넘는다. 작년에는 빨간 샐비어 무더기를 보았는데, 겨울에 마른 잎들을 정리한 것으로 보아 올해는 다른 꽃을 심을 예정인 것 같다. 올해는 어떤 꽃들을 심으며 가꾸는 기술을 뽐내시려나…


한강 길로 가는 길에는 백목련과 자목련이 심어져 있어 마음 내키는 날이면 잎을 따다가 풍선을 불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염창에서 선유도로 가는 한강 길에는 개나리가 몇 미터나 심어져 있어 따릉이를 타고 지나가면 자전거가 공기를 가르는 바람에 흩날리는 개나리 꽃잎도 볼 수 있겠지. 개나리가 질 때 즈음이면 벚꽃이 피고, 벚꽃잎이 흩날리면 내 마음은 벚꽃엔딩을 부르겠지.



아카시아 나무도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으니 나무를 알아차리기 전에 아찔한 향기로 존재를 알릴 것이다. 그러다 또 기다리면 빌딩의 화단에는 팬지 같은 작은 꽃들이 심어지겠지. 민들레 같은 풀꽃도 여기저기 피었다가 질 것이다. 여기저기 담장에는 누군가 공들여 심은 빨간 장미꽃이 피고, 장마가 올 때 즈음 능소화 군락도 곧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름 모르는 꽃은 꽃 이름 찾기 앱을 켜서 수수꽃다리 같은 정겨운 이름들을 발견하리라.


올해도 고르고 골라 사진을 찍고 나의 늙음으로 인해 나의 매일이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내가 죽기 전까지 나의 사진첩은 봄꽃과 눈꽃으로 뒤덮일 것으로 생각하니 여기서 거기까지 계속 꽃길이겠다. 나는 꽃길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린다.


올해부터 꽃을 기다리는 일은 퍽 즐거울 예정이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등장인물 김희성의 대사가 생각났다.

“난 원체 무용한 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그리고, 나는 꺾인 꽃을 보는 것보다 꽃이 피는 곳에 가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2024년 3월 25일 월요일에 발견한 이야기.

※ 밀리로드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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