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 Jul 03. 2024

배경음악과 함께 하는 인생

런중일기 3. 달리기와 플레이리스트

달릴 때의 플레이리스트를 신중히 고르는 편이다. 음악이란 기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진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과거의 기억과 냄새, 감정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음악은 신중하게 골랐던 노래만이 남게 된다. 그게 그때의 최신 가요일 수는 있겠지만…


내 취향은 그리 대중적인 편은 아니었기에 항상 또래들이 듣는 노래와는 다른 곡을 들었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은 노래는 기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어떤 노래는 비 오던 날의 질펀한 흙바닥을 떠올리게 하고, 또 어떤 노래는 환기가 되지 않은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에서 나는 냄새가 떠오른다. 그 노래를 들으며 이별을 예감했던가. 어떤 노래는 그때의 싫었던 기억을 자꾸만 떠올리게 해서 결국 그 아티스트의 곡을 계속 피하게 된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피하게 되는 아티스트가 점점 늘어간다.


예전의 싫었던 기억과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다. 라디오를 듣지 않게 된 것도 무작위로 만나게 되는 옛 노래가 두려워서 일 것이다. 그리고 그걸 여전히 싫어하는 현재의 옹졸한 나를 만나는 게 껄끄럽다.


싫은 기억은 슬픈 기억보다 더 만나기 두렵다. 슬픔은 대부분 나로 비롯되어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따라 나오는 것이라 기억이 희석됨과 동시에 슬픔도 멀겋게 묽어진다. 그에 비해 싫은 기억은 그때의 참고 견딘 것들이 기억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면 아직도 마치 견디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다. 그런 이유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하거나, 짜증이 날 때는 좋아하는 노래를 일부러 듣지 않는다. 좋아하는 노래에는 좋은 기억들만 붙여주고 싶다.



달리기를 하는 순간 역시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기고 싶다. 계절마다, 날씨마다, 시간마다 다른 공기와 빛의 기운, 바람 냄새 같은 것을 긴 시간 동안 기억하고 있으면 훗날에 든든한 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몇 가지 음악을 골라 듣고 있지만, 아직 달리기하는 순간이 떠오를 정도로 각인된 곡은 없다. 그 순간의 기억과 멜로디가 한 번에 각인되는 순간은 마치 바람이 세차게 부는 허공에 이 두 가지 재료를 던져서 한꺼번에 꿰어지는 것과도 같다.


올해는 오디오북을 들으며 달렸기 때문인지 책의 제목이나 표지를 보면 그 책을 들었던 날의 온도가 살짝 떠오른다. 오디오북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진짜 비가 오는지 허공에 손을 뻗어본 벚꽃이 만개한 날, 낭독자의 귀여운 발음 실수에 그 부분이 더 기억에 남았던 처음 걸어본 길을 걷던 늦은 저녁, 인물이 고함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던 너무 화창했던 정오.


언제까지 이 기억들을 가지고 갈지는 모르겠지만 올봄에 책을 들으며 달렸던 기억은 분명, 연말까지 남아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가끔 책을 들고 읽으며 달리는 것을 상상한다. 책을 읽지도 못하고, 달리기도 제대로 못하겠지. 그럼에도 꽤 즐거운 기억이 될 것 같은 엉뚱한 상상. 책 읽기 레이스가 펼쳐지는 것도 재밌겠다. 어떤 책은 너무 재밌어서 달리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앉아 마지막 책장을 넘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난주에 인스타그램 10만 팔로워를 보유한 ‘책여사’의 서울 번개미팅에 갔다 왔다. 부산에 사는 책여사는 가끔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패들 보드를 탄다고 한다. 패들 보드에 올라 워터프루프 책을 엉덩이에 깔고 해변에서 조금 먼바다까지 나가서 책을 읽는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서 읽는 책이라니! 짭짜름한 바다 냄새를 맡으며 햇살 속에서 읽는 책은 얼마나 기억 속에 남을까.


책을 읽을 때 무조건 내용을 기억을 할 필요는 없다. 책도 감상하는 예술이고, 일종의 경험이기 때문에 그때의 감정을 기억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때로는 이 책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긴 하지만) 암기의 의무에서 벗어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경험도 중요하다.


뇌과학자가 단편 소설을 읽는 사람들의 뇌를 관찰했는데, 이야기 속 주인공의 어떤 행동을 읽을 때, 실제 생활에서 그 행동을 할 때 켜지는 두뇌의 부위가 함께 활성화된다고 한다. 이야기는 뇌가 경험을 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다양한 감각들이 책을 읽을 때 활성화된다. 그래서 음악을 들었던 기억보다 오디오북을 읽었던 기억이 더 남은 걸까?


달리며 읽었던 오디오북 중에는 어려운 편인 인문학 도서가 있었다. 꼬박 2주를 넘게 들으며 걷고, 뛰었다. 집에서 종이책을 훑어보기도 했는데 내용 전반은 다 잊어버리고 마지막 문단만 기억에 남았다. 그래도 만족스럽다. 그 책을 처음 시작할 때의 감각부터 새로운 장을 들을 때의 감각이 함께 있다.


음악이든 책이든 그것들은 인생에 적절한 배경음이 되어준다. 배경음악이 곧 나의 인생은 아닐지라도 나의 현재 인생을 반영해 주는, 적재적소에 딱 맡게 깔리는 소리가 된다. 음악이 먼저 왔던, 책이 나중에 왔던 상관없이 내가 머물러 있는 현재의 상태를 짐작하게 해준다. 꼭 음악과 책뿐이겠는가. 그것은 그림이 될 수도 있고,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날씨나 동물,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나를 수식해 준다. 이왕이면 그것들이 나를 위한 빌런이나 사이 아니었으면 한다. 욕심을 부리자면 그것들은 뒤돌아보아도 아름다운 것들이면 좋겠다.


2024년 4월 7일 일요일에 발견한 이야기.

※ 밀리로드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이전 02화 꽃을 기다리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