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 또
또 만남과 이별을 했다. 정말 지겹다. 반복되는 이별은 여전히 아프지만 그것도 할때마다 점점 무뎌져간다. 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점점 더 빨리 중심을 잘 잡고 일어설 수 있고, 방향을 잃지 않고 길을 잘 찾을 수 있다. 연애를 하면서도 이 연애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바라볼 수 있고, 지나갈 걸 알기에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내서 더 충만하게 즐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깔끔하게 뒤 돌아보지 않고 미련없이 다음으로 향할 수 있다. 그 기간이 길든 짧든 난 건강한 연애를 한 것 같다(아마도?). 연애가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난 내 자신을 잃지 않을 만큼 마음 한켠을 나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는 상대방과 관계에 충실하게 쏟았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만나든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줄어들고, 궁금한게 없어 뭘 질문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고, 연인 사이가 되어 데이트를 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도 일정정도 시간이 지나면 권태로움을 느낀다. 이번 사람을 만나기 전에도 어느 정도 길었던 공백기간 동안, 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사랑의 기술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난 적당히 기술을 부리며 그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된 걸까. 관계를 정리할 때에도 어떻게 인간관계를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있겠냐며 종종 연락하고 얼굴보고 지내자는 그 사람의 말에 난 괜찮다고,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쿨하게 돌아설 수 있게 된걸까.
달도 예쁘고
일 년중 일주일 피고 지는 벚나무도 예쁜데
난 뭘 그리 두려워하는걸까 불안해하는걸까
어차피 지나갈 일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 최대한 충실해서 즐기자
오렌지빛으로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도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코 끝을 찌르는 라일락 향기도
함께 보내는 주말도, 혼자 보내는 시간도
지금 느끼지 않으면 지나가버릴 것들
조금 더 가벼워지자
가볍고 기쁘고 충만하게 즐기자
이 사람 저 사람 충분히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았다. 지겨울만큼 데이트도 해봤다. 섹스도 나에겐 어른들의 즐거운 놀이, 재밌는 것일 뿐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할 땐 재밌지만 반복되거나 좀 지나고 나면 나의 자궁건강을 더 걱정하게 된달까. 결혼을 하기엔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 같고 효리 언니 말처럼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생각이 크다. 원효스님 말처럼 난 누구와도 데이트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제발 매력은 좀 있었으면 좋겠다. 지루하지 않게. 외적으로 얼굴이 잘 생겼든, 몸이 근육질이든, 키가 크든, 내적으로 똑똑해서 지적이든, 유머러스하든, 하는 일에 열정이 있든 간에 매력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넷플릭스에서 이지은이 출연했던 페르소나 중 “제발 조금이라도 매력적일 순 없어?”라는 대사는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더 큰 틀에서 보면 연애도 일상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 한 때 자극적인 것만을 좇았던 때가 있다. 그 때 난 천주교에서 불가지론으로 바뀌었는데, 어쩔 수 없이 성당에 가서 오랜만에 고해성사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별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신부님은 내게 “맨밥만 먹기가 싫어서 여러가지 자극적인 것들을 좇고 있어요. 하지만 인생은 그런게 아니거든요.” 라고 말씀해주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 말씀은 그 후로도 여러번 새기게 되었는데 내가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말이다. 그래, 인생은 맨밥만 먹는 것이다. 맨밥을 씹고 씹고 씹어서 단물이 나서 그 단물을 즐겨야 하는 것이다. 이걸 깨닫고 난 루틴을 만들었다. 남자친구도 안 만들고 술도 안 마시고 혼자서 운동하고 책 읽고 해야할 일에 충실하다보니 어느 순간 운동하면서 듣는 음악에, 근육에 느껴지는 자극에, 차오르는 숨에 폐가 뻐근할 때, 몰랐던 지혜와 지식을 알게 되었을 때, 나에게 선물하는 꽃향기에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가끔 데이트를 해도 루틴 중 하나일뿐 크게 다가오는 것이 없다. 만나서 지루한 사람은 그대로 보내드리고, 그나마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조금 더 만나며 적당히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또 헤어질때가 되면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실 이번 연애 때는 여자친구 남자친구라는 라벨링이 큰 의미가 없게 느껴졌었다. 자연스럽게 관계가 흘러가는대로 두자고 했고, 만나다보니 전‘남자친구’가 알아서 자연스럽게 라벨링을 씌우긴 했었지만 그는 진짜 내 남자친구였을까?
이번 주말엔 선을 본다. 정말 부탁한 적도 없었지만 거의 강제적으로 나가는 자리다. 또 데이트라니 정말 지겹다. 잠깐 나눈 대화에서는 매력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부디 이번 주말이 지루하지 않기를 또 바라본다. 난 지금 어디쯤 표류하고 있는걸까, 의문이 들때도 있다. 그래도 또 다시 방향을 잘 잡고 앞으로 나가리라 믿는다. 난 여전히 아침 저녁으로 운동을 하고 있고, 짬내서 책을 읽고 있고, 일도 집중해서 열심히 하고 있다. 음악 들으며 빨래를 갤 때 행복을 느끼고 길가에 피어있는 꽃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조만간 다시 정신과에 가서 상담치료를 시작할 예정이다. 상담치료가 나의 끝나지 않는 권태로움을 좀 끝내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쩌면 상담 끝에 이 세상엔 사랑이 정말 존재한다고 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