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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혼 Feb 06. 2020

<이른 나이에 이른 '기레기'>Persona

객관적 추락과 주관적 성취 그 사이

'페르소나'란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사람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그림자와 같은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했다.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


성격장애의 일종이기도 하다. 정서, 행동, 대인관계 등에서 극히 변덕스럽고 예측이 불가능하다. 기본적으로 허무감과 극단적인 감정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제력이 없고, 자기 파괴적이며, 타인을 쉽게 믿다가 쉽게 상처 받기를 반복한다. 전체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


나중에 하기로 한 이야기를 해보자.


현재 기자질 6년 차에 접어들면서 5~6년 만에 보거나 1~2년 만에 보는 지인들은 나에게 말한다.


"너 너무 많이 변했다. 무슨 일 있었어?"라고


그래서 답한다. "응, 예전의 내가 너무 불쌍하더라고. 타인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면서 살았어"


엥? 바뀌었다니?


나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가 많이 변질되고 굉장히 솔직해졌다는 것을 말이다. 20대 초반까지의 난 배려심이 넘쳤다. '오지라퍼'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타인을 먼저 도와주려 했다. 상당히 멍청했다고 볼 수도 있다. 힘들어도 웃었다.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상황을 겪고 노력과 결과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기자질'을 하며 로비를 하는 인간과 '슈킹'을 하는 버러지들이 널린 현실을 봐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브로커'라고 불리는 그들은 상당히 냉정하면서도 이성적이었다.


그들과 달리 과거의 난 상당히 '감정적'이었다. 감정에 따라 취재하고 일하고 기사에도 감정에 묻어났다. 취재 과정에서도 욕을 하며 상대방을 압박했다. '갑질'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다 2018년 말, 삼성에 관한 단독 보도를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많이 망가졌다. 슬퍼해야 함에도 눈물이 나지 않더니 미친놈 마냥 웃기도 했다.


이때 처음 말했던 것 같다. "어차피 노력해도 바뀌지도 않는 거" 포기라는 것을 처음 하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더니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필름이 끊길 때도 있었다.


"뇌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기억상실인가?"라고 의심했다. 그렇게 서서히 변질됐다.


다른 사람 같구나


어머니가 지난해 나에게 한 말이다.


어머니는 "순수하고 당찼던... 긍정적이던 우리 아들이 없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난 "어머니, 지금의 제 모습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앞서 말했 듯 난 기자가 좋아서 한 것이 아닌 한 문장대로 살고 싶어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람이 되자"라는 작으면서도 소소한 꿈이다. 이 문장을 그대로 실천한다면 기자가 아니어도 다른 직업을 택해도 된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문장은 내 뇌리에서 '삼진 아웃'됐다.


감정적으로 취재하는 사람이 아닌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취재하고 싶어 졌고 직업대로 맞게 성격도 바뀌게 된 것 같다.


버닝썬 특별취재 팀원이었던 형이 나에게 한 말이다.


 "혁진아 난 네가 안타깝다. 왜 이렇게 널 희생하면서 뭘 바칠라 그래? 그럴 필요 없어. 이용하라고. 난 기자라는 직업을 좋아하지 않아. 재밌어. 모든 순간이 게임이야. 타깃을 정하고 감정에 욱해서 미친개 마냥 달려들지 말고 사냥개가 되자 우리. 철저해져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이젠 그 말에 공감이 된다.


기자라는 직업은 이제 나에게 순수하게 타인의 행복과 희생이 아닌 나의 '재미'를 위한 수단이 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객관적 인간관계에서 추락한 것일까? 반대로 생각하면 주관적 성취감은 매우 좋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예전의 난 사회적으로 만난 사람과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같게 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철저히 이익이 없다면 말조차 하지 않는다. 대외적으로 크게 변한 점은 없으나 상세하게 구멍은 커졌다. 사람을 가리기 시작했다.


객관적 추락 주관적 성취감. 어느 순간 그 사이를 고민할 때가 있을 법도 할까? 알 수 없다. 인연과 감정이라는 건 정말 무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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