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무료한 너에게,
자유분방한 연애와 즉흥적인 행복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아빠.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아빠의 어린 애인. 그 사이를 뚫고 아빠의 새 부인이자 엄마 역할을 하러 나타난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어른 여자. 여름날 휴양지에서 만난 남자친구까지. 본인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마구잡이로 생겨나는 혼란스러운 관계들 속에서 열일곱 세실은 착한 소녀인 듯 악동인 듯 굴다 뜻밖의 비극을 마주한다.
내내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상처만 주고받던 바깥 세계의 누군가를 향한 본인의 감정을 세실이 비로소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 꽤 오래간 슬픔이며 기쁨 같은 감정들을 잊고 산 것 같다는 네 고백이 떠올랐다. 딱히 화나는 일도, 불편한 마음도, 눈물 철철 나는 순간도, 환희에 겨운 미소나 웃음도 없이 빈 깡통처럼 하루하루 산다던 네가 세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궁금했기에.
찬란하고도 고통스러운 옛 시절을 떠올리면 지루한 오늘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고 할 것 같기도 하고, 이리저리 어지럽게 날뛰는 세실의 감정이 다시금 “갑갑하고 아릿해서 묵직하고 아름다운” 너의 슬픔을 자극할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어떤 감정이 언젠가 네 주위를 다시 배회할 때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 인사하는 순간 네 삶의 또 다른 절기가 시작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아르테,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