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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인리 May 07. 2020

시 (詩)

쉼의 박자가 있는 세계로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시가 사라진다.”


좋아하는 정현정 작가님이 집필한 ‘로맨스는 별책 부록’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에피소드로 점철되어 있을 것만 같은 제목과는 달리 이 드라마는 도서 출판 회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책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룬다. 그 짧은 대사를 들을 때까지 한 번도 시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시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라지는 시에 일조하는 이는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나였다.


시를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언제일까. 지하철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중에, 또는 미디어를 통해 간혹 접하게 되는 시를 제외하고는 내 자의로 시집을 사서 시를 읽어본 기억이 희미했다. 시를 생각하자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교과서에 나온 시를 외워 낭송하면 수행 평가 점수에 가산점을 준다고 했다. 어느 쉬는 시간에 나는 선생님의 사무실로 찾아가 벌게진 얼굴로 시를 다다다다 빠르게 뱉어냈다. 시를 암송했다기보다는 아마추어 힙합 가수의 도통 알아먹기 어려운 랩에 가까웠으리라. 시의 운율과 박자, 의미를 좀 더 음미하며 암송하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선생님의 눈동자에 짙게 비쳤다.


그 드라마 대사를 계기로 시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 산 시집은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두 가지 이유로 구매했다. 하나, 유명하다는 보들레르의 시가 궁금해서. 둘, 마침 구경한 보들레르 시집에 좋아하는 앙리 마티스의 삽화가 함께 편집되어 있어서. 사은품으로 받은 마티스의 삽화가 그려진 유리잔에 금빛 맥주를 거품 가득하게 따라놓고는 보들레르의 시를 하나씩 읽는 기쁨이 쏠쏠했다. 낭만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그의 우아한 시가 좋았는지, 마티스의 그림이 좋았는지, 아니면 그저 맥주 맛이 좋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적당히 오른 취기에 시집의 모든 것이 좋게만 느껴진 덕에 여전히 침대 맡에 두고는 가끔 들춰보곤 한다.


그다음으로 산 시집은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골라든 시집의 목차에 각기 다른 과일을 주제로 한 시들이 쪼르르 정렬되어 있는 것이 맘에 들어 구매했다. 과일 시리즈 중에서 포도라는 시를 가장 좋아한다.  포도가 익는 계절의 “밤과 새벽의 틈새”에서 잊고 싶지 않은 이를 떠올린다는 시는 쉽게 잠 못 드는 밤이면 종종 생각이 나 다시 꺼내 읽게 된다.


가장 최근에는 나태주 시인의 ‘혼자서도 별인 너에게’라는 시집을 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풀꽃처럼 너도 그렇다면서 우리 모두를 귀하게 만들어준 시인이 이번에는 나를 반짝거리는 별로 느껴지게 했다. 별, 들판, 햇빛, 꽃잎, 구름과 바람, 강물, 노을까지. 자연의 평화로움을 빌어 홀로 외로운 이들을 다정하게 위로하는 시인의 말이 따뜻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들려줄 곳 없어 산수유꽃 옆에서 고백했다는 시, 산수유꽃 진 자리는 시인의 마음이 사랑스러워 내내 곱씹게 된다.


서울에서의 내 하루하루는 빽빽하게 채워진 문자의 연속이다. 아침마다 확인하는 온라인 뉴스, 회사에서 쓰는 메일과 문서, 수많은 사람들과의 대화. 밀집도 높은 이 복잡한 도시에 논리 정연한 말이 가득하다. 그 정교한 말이 때로 벅차고 피로하다. 이미 충분히 바쁘고 힘에 부치게 노력하는 내게 더 열심히 살라고, 더 힘내야 한다고 재촉하는 것만 같다.


이제 그렇게 지치는 하루 끝이면 시를 읽는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소리 내 읽기도 하고, 좋은 구절은 외워보기도 한다. 간결히 골라진 말이 주는 낭만과 틈새, 다정함으로 나는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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