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보니까,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

리흐테르의 전쟁 소나타 3부작을 들으려면!

by 유진

혼란은 항상 리듬을 타고 온다 (소나타 6번)

체계도 규칙도 없는데, 내가 무언가를 느끼려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그 생각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6번 1악장을 재생하는 순간 불쑥 떠올랐다. 연주자는 누구지? 처음 보는 이름이다.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Sviatoslav Richter)가 라이브로 연주한 음원을 듣고 있는데, 뒤뚱거리는 음 사이로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구글에 이름을 검색하니 나무위키가 화려한 이력을 줄줄 읊는다. BBC 뮤직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라고 한다. (솔직히 나에겐 크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이런 타이틀이 있으면, 적어도 ‘듣기 좋은 연주’일 거라는 믿음을 마음속에 한 줄 긋게 된다. 클래식은 직관적으로 매력을 전하지 않는 곡이 많기에, 오히려 내가 이유를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재미가 있지 않은가. 또, 곡이 당장 이해되지 않더라도 연주자가 유명하다면 ‘최소한 괜찮은 연주일 것’이라는 집단적 보증이 생긴다. 그러면 나도 이렇게 되새긴다. “훌륭한 연주자가 친 거니까, 듣다 보면 언젠가 이해되겠지.” 물론 연주 해석이 내 취향과 맞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나도 마음에 닿지 않을 수 있다.


달릴까, 계속 달릴까 하는 사람 (소나타 7번)

엇, 방금 애플뮤직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리흐테르는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7번 연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본격적으로 얻었다고 한다. 단 4일 만에 곡을 익히고 초연했다니, 더 궁금해진다. 어떤 해석을 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건반에 손을 얹었을까?


아마 그래서 애플 클래시컬 앱에서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를 검색하면, 그의 버전이 최상단에 뜨는 듯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소나타 6~8번은 이 연주자에게 맡겨보자.


다시 첫 문장을 꺼내본다. 체계도 규칙도 없는데, 내가 뭔가를 느끼려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이번엔 7번의 1악장이 귀를 채운다. 특유의 뒤뚱거림, 재간스러운 몸짓. 프로코피예프 곡에는 강아지가 잔뜩 신났을 때의 발재간 같은 리듬이 있지 않은가? 그 위에 약간 오묘하고 특이한 음색이 흑백 필터처럼 튀어오른다. 그러다가도 순간적으로 확—아름다워지는 선율이 스쳐간다.


2악장은 무겁다. Andante caloroso, 느리고 감정을 담아 연주하라는 뜻처럼, 발이 물에 젖어 무거워진 듯하다. 3악장에선 다시 1악장의 인물이 돌아온다. 기세가 당차지고 맹랑해졌다. 예측할 수 없는 흐름, 그러나 방향성은 있다. ‘무조건 전진!’


몇 달 전의 나였으면 ‘어렵다, 난해하다’고 느꼈겠지만, 지금은 “재밌네? 어디로 튈까? 또 예뻐질 거지?” 하는 식의 물음을 던진다. 어렵게만 굴던 곡이, 그저 첫인상이 가볍지 않았던 것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위태로운데 아름다울 수 있나? (소나타 8번)

충분히 재미를 본 뒤 8번으로 넘어왔다. ‘느리게, 달콤하고 부드럽게(Andante dolce)’라는 1악장 제목이 흐름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미묘하게 기울어진 음들이 있다. 안정적인 듯 보이지만 완전한 평온은 없다. 당장 발을 헛디디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움 속의 부드러움이다.


2악장은 훨씬 편안하다. 방금까지 삐걱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중력에 안착한 듯하다. 3악장은 달린다. 속도감 있는 박자 속에 우다다, 우쾅쾅 내딛다가도 또로롱— 하고 튀어오른다. 마지막엔 건반 하나가 홈런이라도 친 듯, 소리 조각들이 한곳으로 몰려들다 두둥— 하고 끝난다.


참, 이 작곡가는 청자를 지루하게 두지 않는다. 곡마다 그의 성격이 가득 배어 있다. 이 ‘4일의 소나타’는 어린 시절 악동들의 에너지를 보는 듯 매력적이다. 듣고자 한다면, 생각을 비워라. 그냥 리듬을 따라가면 된다. 어디까지 튈지, 턱을 치켜들고 건반을 내려다보자. 관객의 권리는 피어난 것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데서 시작된다. 당신의 ‘처음’을 내어주라. 나도 그렇게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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