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숨기는 대신 소리에 묻어버릴 수 있다면
일단 지금 내 숨은 6.5이다. 5보다는 피곤하고, 10보다는 덜하다. 미묘하게 당이 떨어지고, 거울을 보면 다크서클이 살짝 내려와 있다. 오후에 오는 애매한 피로감이다. 한숨이 숫자로 보인다면, 어디쯤 숨겨 둘 수 있을까? 나는 일단 체감상 심장 딱 뒤쪽에 마음을 꾹꾹 감춰 누르고 있다. 고요한 공간 안이기 때문에 자유로워질 수 없고, 외출복 차림이기 때문에 편하지도 않다. 혼자 있다고 시끄러운 타입은 아니지만, 정적으로 흐르는 소소한 잡음들—공기청정기 소리,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이 현재까지는 솔리스트다.
6.5 정도의 짧은 숨이 몇 개쯤 있을까. 마음에 하나, 머리에 하나, 다리에 하나. 강박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가끔 가만히 있는데도 갑갑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지금 내가 딱 그렇다. 아마도 같은 자리에 반나절 넘게 앉아 있어서 그런가 보다. 지금 6.5의 숨이 양쪽 다리에 대충 네 개쯤 달린 것 같다. 이 갑갑함을 내보내려면 최소한 오후 7시 20분은 돼야 한다. (30분에 공연을 보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가장 큰 휴식처이자 통로는 공연장이다. 여행을 멀리 떠나지 않아도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장소다. 올해 들어서야 체감했지만, 한국에 클래식 공연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물론 뮤지컬 10만 원 넘는 좌석 한 번 볼 바에야 클래식 공연을 두세 번 나눠 보는 식이라 최종 소비는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메이저 연주가가 아닌 이상 꽤 합리적인 가격으로 실연을 즐길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아버리면 다시 돌아가기 어렵다. 이런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다름 아닌 내 지갑이다. (ㅡㅡ)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쓸데없는 푸념을 내려놓으니 한숨 지수가 5.5로 줄었다. 여기서 더 내려보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까 듣고 깜짝 놀랐던 곡 하나를 다시 들으면 된다. 차이코프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듣자마자 귀와 마음이 뻥! 뚫렸다. 장담컨대 이 도입부를 싫어할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들판의 바람과 해변의 밀물이 동시에 쏟아져 내려오는 느낌이다. 진작에 들을 걸. 아는 분이 그렇게 좋다고 자주 말했었는데, 요제프 시게티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1번에 빠져 귀 기울이지 못했다가 이제야 듣는다. 여러분은 나처럼 늦지 않길 바란다.
사실 클래식 작곡가 이름은 다들 아는데, 왜 그렇게 유명한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땐 말보다 음악이 낫다. 명곡 하나 들으면 바로 이해가 된다. 고전 소설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처럼, 이 음악도 음원과 영상 매체를 타고 살아남아 고맙다. 나중에 꼭 독일에 가보고 싶다. 클래식 공연만 열 편 보고 와야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5.5가 4.0으로 떨어진다. (학점이냐?)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이나 궁금한 것이 하나둘 쌓인다. 언젠가 어딘가로 가봐야지, 이 곡을 들어봐야지, 악보도 읽어봐야지, 이 연주자는 누구일까, 다음 레퍼토리는 뭘까. 꼬리를 무는 궁금증들이 내 삶에 좋은 방향키가 되어준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꿈도 없고, 취미도 없다는 사람에게 ‘그냥 아무거나 해 보라’는 말은 너무 쉽게 들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억지로라도 하나를 ‘지정’해 보면 좋다고 생각한다. 나도 단번에 취향을 알았던 건 아니다. 꽤 돌아서 온 길이다.
숨을 대신할 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깊은 소리를 가진 도구를 떠올리면 좋겠다. 첼로나 콘트라베이스, 아니면 우아한 관악기도 괜찮겠다. 나는 이 글을 이곳에 내려놓고 현악기의 품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내가 직접 연주하지는 않지만, 전공생들의 합주를 조용히 마음에 담을 것이다. 분명 아까 그 긴 숨이 1.0까지 내려갈 것이다. 왜 0.0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나는 10대가 아니니까. 한밤중엔 조금 피곤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품 하나 정도는 남기고, 다시 돌아오겠다.
당신도 지금 꽤 높은 숫자의 한숨이라면 차이코프스키로 환기시켜도 좋고, 아니면 쉬니트케로 더 이상해져 봐도 좋겠다. 그의 음악은 불편하고, 친절하지 않고, 이상하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와 잘 맞는다. 우리 중에 누가 완전한가? 삐뚤빼뚤하고 어정쩡하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당신이고 나니까. 그렇기에 그의 음악은 꽤 들을 만하다. 아마도.